머릿속에서 경고음이 울려 퍼졌다. 소녀는 레이저를 경계어린 시선으로 힐끔대며, 무턱대고 앞으로 나서 가주 부부를 불러 세웠다.

“가주님, 말씀 드릴 게 있어요.”

“뭐지?”

“일프에 관한 이야기예요.”

레이저는 여전히 아무런 반응이 없었다. 소녀는 다시 말을 이어나갔다.

“그자가 타국과 결탁한 게 아닐까 의심스러워요.”

방안이 순간 조용해졌다. 하지만 다들 뭔가 다른 생각을 품고 있는 것은 얼굴에 드러난 표정만 봐도 알 수 있었다. 가장 먼저 움직인 것은 잉겐이었다. 뒤돌아선 그녀는 대답을 요구하듯 음침한 얼굴의 레이저를 바라보았다.

“레이저?”

“……시중의 움직임을 살펴본 결과, 일프가 태양왕국과 손을 잡았을 가능성은 8할에 가깝습니다. 주된 목적이라면 물자를 수출하는 것일 터인데, 그는 제삼자를 거쳐서 자신과 태양왕국이 직접적인 무역 관계를 맺고 있다는 사실을 숨기고 있습니다.”

가면을 쓴 레이저는 어깨를 으쓱이며 낮은 톤의 쉰 목소리로 말했다.

“다이애나가 그렇게 ‘추측’한 것은, 샤킬이 자신들의 목적이 왕위쟁탈전보다 더 멀리에 있는 무언가를 노리고 있다고 말했기 때문입니다.”

소녀는 고개를 끄덕였다.

“맞아요ㅡ”

“즉 전후의 경제권 장악이 목적이겠지요.”

레이저는 갑자기 소녀의 말을 끊고는 전혀 예상하지 못했던 답변을 꺼내놓았다.

“일프는 그동안 줄곧 시장을 장악하고자 했고, 상인 길드와도 밀접하게 교류해왔습니다. 왕위쟁탈전 이후 시장을 장악한 자는 가장 큰 이익을 얻을 수 있을 테니까요. 또 왕위후보자에 따라 국외무역을 대하는 태도도 달라지기 마련일 테니, 일프는 그런 점을 고려해 자신이 지지할 후보를 이미 선택한 듯합니다.”

“흠, 자네의 의견에 동의하네. 일프는 확실히 위험한 자야. 하지만 스스로 왕위 쟁탈전에서 물러난 이상, 증거 없이 함부로 그를 건드리는 것은 힘들어.”

크무트의 입꼬리가 스륵 올라갔다.

“그러니 아직 일프와 완전히 척을 질 필요는 없지. 하고 싶은 말은 그게 끝이냐, 다이애나?”

소녀는 고개를 치켜들며 필사적으로 말했다.

“또, 또 있어요. 일프는 항구에……!”

“ㅡ사무실을 두었지요. 물류와 해운을 관리하는.”

레이저는 또 다시 소녀의 말을 가로챘다.

“이걸 말하려는 거였겠지. 맞나?”

“그……그걸 어떻게?”

소녀는 식은땀을 흘리며 경악한 표정으로 레이저를 바라보았다.

그의 설명은 두 사람이 당시에 나눴던 말과 전혀 달랐다. 아니, 정확히 말하자면 레이저는 이 사안을 어떻게 생각하는지 말한 적이 없었다.

그때는 별일 아니라는 투로 말했으면서, 지금은 또 기이할 정도로 자세하게 설명하고 있다니. 뭔가 심상치 않았다. 하지만 그녀에겐 레이저의 해석을 반박할 만한 구석이 없었다.

“항구에서 일하는 수부들에게 물어보니, 연회가 열리기 전부터 샤킬은 몇 번이나 항구에 드나들었다고 합니다. 일프와 밀회를 가지기 위해서였겠지요. 하지만 이를 일프가 납치행각에 연루되었다는 증거로 내세우기엔 설득력이 부족합니다.”

가주를 향해 고개를 숙인 레이저의 입꼬리가 살짝 올라갔다.

“더 할 말이 있나?”

소녀가 말하고자 했던 것은 그게 아니었다. 하지만 레이저의 의견엔 빈틈이 없었고, 자신에게도 반문할 증거가 없었다. 소녀는 그저 사람들의 시선 속에 고개를 떨굴 수밖에 없었다.

소녀는 침을 삼키며 갈라지는 목소리로 말했다.

“없습니다, 하지만…….”

“그래, 그럼 여기까지 하도록 하자꾸나.”

잉겐은 다시 미소를 지었지만, 그녀는 소녀가 말하려던 이야기에 대해 큰 관심이 없는 것 같았다.

느릿느릿 떠나가는 가주 부부를 바라보며 소녀는 망연자실한 감정만 남았다. 레이저의 이야기는 무척이나 그럴듯하게 들렸지만, 아니, 너무나 그럴듯해서 오히려 진상을 감추고자 노력하고 있음이 너무나 뚜렷해보였다. 당장이라도 가주 부부에게 레이저를 조심해야 한다고 경고하고 싶었지만, 지금 이 순간 그녀는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가주는 자신보다 레이저를 더욱 신뢰하고 있다는 사실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