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놈이 노리는 건 사막왕국에서의 지위라고 생각했는데, 지금 보니 그런 것 같지도 않군……. 상관없다. 나는 이 녀석이 다이애나인지 아닌지는 알 바 아니야. 네놈이 죽을 것인지, 소녀를 죽일 것인지. 카멜레온, 네놈에겐 두 가지 선택지뿐이다.”

아니, 처음부터 선택지는 하나뿐이었어.

그는 절망 속에서 생각했다. 여기까지였다. 할 수 있는 일은 할 만큼 했다. 그러나 도무지 방법이 없었다. 소녀가 죽어가는 장면이 머릿속에서 반복적으로 재생되는 데도 그런 생각을 멈출 방법이 없었다.

등대가 함정이라는 사실은 진작부터 알고 있었다. 하지만 소녀가 이곳에 온 이상 어쩔 수 없었다. 누구도 그녀를 구할 사람이 없었고, 누구도 그녀를 구하고 싶어 하지 않았다. 이 세상은 소녀의 존재가치를 부정했으며 소녀가 본디 가져야만 했을 모든 것을 앗아갔다. 자신이 오지 않았다면 누가 소녀를 보살펴줄 수 있단 말인가? 누가 소녀를 위해 울어줄 수 있단 말인가?

소녀가 진정 죽어야 할 운명이라면.

소녀의 죽음을 지켜보느니, 차라리.

레이저는 침중한 얼굴로 눈을 감은 채, 들고 있던 단검을 내려놓으려고 했다.

“멈춰.”

팔런의 목소리가 레이저의 움직임을 멈춰 세웠다.

“교활한 놈, 수작 부릴 생각 말고 그 단검으로 자결해라.”

“안돼! 듣지 마요, 레이저!”

당황한 소녀는 남자의 품속에서 발버둥치며 레이저를 향해 고함을 내질렀다.

“당장 후안 가로 돌아가요! 저 따위보다 당신이 가주님께 더 중요한 사람이잖아요!”

“그 아이를 살려주겠다고 약속할 수 있나?”

레이저는 소녀의 말을 무시한 채, 칼을 자신의 심장에 겨눴다.

“약속하지.”

팔런의 목소리는 어딘가 저항할 수 없는 마력이 깃들기라도 한 듯, 레이저의 마음을 한결 가볍게 만들었다.

머릿속에 기억의 편린이 스쳐지나갔다. 별다른 의미가 없어 보였지만 하나같이 레이저의 일생에 큰 영향을 주었던 기억들이었다. 그가 처음으로 들었던 철검의 무게, 코를 찌르는 배술(*게임에선 이자주梨子酒)의 달큰한 냄새, 독약을 바른 단검, 그리고 갓난아기의 울음소리…….

마음속을 가득 채웠던 분노와 증오는 차츰 흩어져갔고, 어둠 끄트머리에서 반짝이는 작은 빛만이 남아, 미약하게, 그러나 강렬하게 그를 비추어주었다. 그때의 감정이 다시금 샘솟았다. 레이저는 엄숙한 표정으로 소녀를 향해 고개를 끄덕였다. 그 진심이 담긴 눈빛에 소녀는 아연해지고 말았다.

이걸로 된 거야.

“잠깐만! 안돼! 안돼요!”

소녀는 거의 애원하듯 고함을 질렀다.

“대답해요, 레이저! 제발 여길 떠나요!”

레이저는 가볍게 숨을 내쉬었다.

“3호, 살아야 할 사람은 너다. 언제나 그랬어.”

그리고, 그는 더 이상 망설이지 않았다.

어쩌면 줄곧, 그는 그저 소녀가 그 말을 이해해주길 바랐던 것일지도 몰랐다.

결국 소녀의 모든 인생을 앗아간 것은 자신이었으니, 목숨으로 그 빚을 갚을 수 있다면, 응당 그렇게 하는 것이 도리일 터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