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머리에 피가 몰리신 모양이로군. 할리파 가의 가주만으로도 부족하다면, 내가 대신 어울려드리지.”

지금껏 줄곧 가주 곁에서 묵묵히 자리를 지키던 레이저가 입을 열었다. 아래를 깔보듯 내려다보는 모습이 무척이나 도발적이었다.

“감히 도마뱀 흉내나 내는 변절자 카멜레온이 끼어들 사안이 아닐 텐데?”

“앞으로 걸어 나왔잖소.”

“뭐라?”

레이저는 칼자루에 손을 올렸다. 엄지손가락으로 가볍게 칼을 뽑자 섬뜩한 빛이 흘러나왔다.

“카멜레온은 자기 영역에 매우 집착하지. 감히 영역을 침범했다는 것은 내게 도전하겠다는 뜻이오.”

“좋아, 이 빌어먹을 놈아! 당장 내려오지 못하겠느냐?”

샤킬이 강렬한 분노와 살기가 서린 웃음을 터뜨렸다. 이젠 더 이상 아무도 말릴 수 없었다.

소녀는 레이저의 도발적인 움직임을 보고는 대담하게 벌떡 일어섰다. 그리고 냉랭한 태도로 레이저를 내려다보며 말했다.

“레이저, 수흐 가의 가주는 저와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잖아요. 당장 무례를 저지른 것에 대해 사과하세요.”

겉으로는 레이저를 꾸짖었지만, 사실 그가 끼어들어준 덕분에 겨우 진정할 수 있었다. 소녀는 자신이 어떻게 행동해야 할지를 떠올렸다.

“예, 아가씨.”

레이저는 느긋한 태도로 한 마디를 덧붙였다.

“죄송합니다. 수흐 가의 가주여. 카멜레온은 낯가림이 심할뿐더러 성질도 더러운 생물이지요. 부디 놀라지 않으셨길.”

“흥…….”

샤킬이 불만 어린 모습을 보였지만, 소녀는 만면에 웃음을 지으며 소리쳤다.

“여러분이 제게 많은 기대를 품고 계신다는 점, 확실히 알고 있습니다. 비록 제가 싸움에 능하다 자부할 수도 없고, 스스로를 용맹한 전사라 칭할 수도 없습니다만, 시대는 이미 바뀌었지요. 도마뱀 일족에게 있어서 힘이란 단지 싸움 실력을 의미하는 게 아닙니다. 승리 역시 단순히 생사로만 결정되지 않지요.

“아가씨의 말씀은 내가 시대에 뒤처졌단 뜻이오?”

사킬이 클클 웃으며 말했다.

“아뇨, 제 말은, 승리를 얻기 위한 방법이 많아졌다는 뜻이랍니다.”

소녀는 그가 이전에 다이애나 아가씨를 어떻게 평가했는지를 떠올렸다.

“레이저, 칼을 건네주세요.”

“아가씨…….”

“얼른.”

소녀는 손가락을 까닥였다. 레이저는 사람들의 웅성거림 속에서 장검을 뽑아 그녀에게 건네주었다. 검을 건네받은 소녀는 그걸 양손으로 거머쥐고 높게 치켜들었다. 두 번째 웅성거림과 함께, 그녀는 수흐 가의 가주를 향해 힘껏 칼을 내던졌고, 정확히 그의 곁에 놓여 있던 통양고기 바비큐를 잘라냈다.

“자, 가주님은 이제 그 검을 제게 되던질 수도, 아니면 제가 당신을 위해 잘라둔 양다릿살을 취하실 수도 있지요. 제가 승리할 수 있는 길은 가주님의 선택에 달려 있답니다.”

소녀는 밝게 웃으며, 몸을 앞으로 깊게 숙였다. 얼굴은 베일 뒤에 감춰져 있어도 사람들은 소녀의 말솜씨는 가릴 수 없다는 걸 깨달았다.

당연한 말이지만, 그는 절대로 좌중 앞에서 칼을 뽑아들어 다이애나를 두 쪽 낼 수 없었다. 그렇지만 그렇게 하지 못한다는 것은 곧 다이애나의 언변을 인정할 수밖에 없다는 뜻이기도 했다. 수흐 가의 가주는 시선을 내리깔며 자신의 다리 아래 나뒹굴고 있는 양다리를 바라보았다. 잠깐의 침묵이 흐르고, 그는 손을 뻗어 양다리를 집어 들었다. 그리고 시원한 미소를 지었다.

“ㅡ좋아, 아가씨의 뜻을 받아들이지.”

“감사합니다, 수흐 가의 가주여. 이제 우리는 함께 승리를 거둘 수 있겠지요.”

거대한 도마뱀이 호쾌하게 웃음을 터뜨렸다.

연회장의 분위기가 호전되자, 사람들은 손을 들어 올리며 환호성을 내질렀다.

“다시 한 번 부탁드립니다! 저도 아가씨가 잘라주신 고기를 받고 싶습니다!”

“다이애나 아가씨, 이번엔 부디 제 칼을 써주시길!”

소녀는 옅게 미소 지으며 다시 자리에 앉았다. 가주 부부가 동시에 안도의 한숨을 내쉬는 게 똑똑히 들려왔다. 그 순간, 자신감과 희열감이 머릿속을 가득 채웠다. 아무도 신경 쓰지 않았지만, 그녀는 다이애나 아가씨를 대신해 체면을 세운 것이었다. 이루 말할 수 없는 성취감이 몰려왔다.

얼마 안 있어 그녀는 겨우 연회장을 빠져나갈 수 있었다. 레이저의 호위를 받으며 연회장을 떠나는 순간, 소녀는 그의 표정을 보면서 다시 한 번 득의양양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