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고했어요, 레이저.”

그녀는 다이애나의 방 앞에 서서 레이저를 향해 말했다. 이번엔 다이애나처럼 행동해야 한다는 사실을 잊지 않은 듯했다.

레이저는 주변을 살피며 사람이 없는 것을 확인한 뒤, 차가운 목소리로 말했다.

“내일은……”

“응?”

“수업이 끝나면 바로 날 찾아와라. 전투 훈련에 더 박차를 가해야겠어. 다이애나를 완전히 따라하지 못한다면, 적어도 싸울 때만이라도 쓸모가 있어야겠지.”

그녀는 입술을 깨물었다. 레이저의 말에 반박할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수업이 끝날 때면 너무 늦은 시간인데….”

“못 하는 건가? 아니면 하기 싫은 건가?”

레이저의 뼈 있는 도발에 그녀는 반항하듯 살짝 분한 티를 냈다. 하지만 이내 감정을 감추며 표정을 가다듬었다. 그리고 억지로 쥐어짜듯이 말을 내뱉었다.
 

“할 거예요.”

레이저의 입가가 올라갔다. 하지만 그는 소녀를 칭찬하는 대신 고개를 살짝 끄덕이곤 휙 돌아섰다. 소녀가 무슨 표정을 짓고 있는지 궁금하지도 않은 듯 묵묵히 걸어갔다.

레이저는 홀에 들어섰다. 도마뱀 호위병들이 모여서 큰 소리로 무언가를 논의하고 있었다. 농땡이를 피우고 있는 것 같기도 했다. 레이저는 우두커니 선 채 자신을 알아챌 때까지 그들을 노려보았다. 뒤늦게 호위병 무리들의 목소리가 잦아들었다. 그들은 경계심과 두려움이 섞인 표정으로 레이저를 바라보았다.

“무슨 일인가?”

레이저가 물었다.

“방금 전에 가주께서 시종 하나를 처리하라 해서.”

호위병 중 하나가 입을 열었다.

“해 질 무렵에 일도 내팽겨치고 몰래 빠져나가려고 하더군. 누굴 만나러 간 건지는 모르지만. 자기 말로는 주방장이 심부름을 시켰다던데.”

“이 시간에 심부름이라?”

“그래. 의심스럽지 않나? 우리가 바로 막아 세우고 몸을 수색하니 품속에서 편지가 나왔어. 주방장도 자기는 심부름 같은 건 시킨 적이 없다고 했고. 그래서 가주님의 동의를 받아 그놈을 처리하려고 했지.”

레이저는 눈을 가늘게 떴다.

“그럼 너희들은 여기서 뭘 떠들고 있었던 것이지?”

“편지의 내용에 대해 이야기 중이었다. 슐레이만은 그냥 집에 보내는 편지라고 말하고 있지만, 나와 카림은 뒷돈을 챙기려고 했던 걸로 보고 있지.”

호위병은 레이저에게 다가와 낮은 목소리로 속삭였다.

“인간, 시장에서 누군가 후안 가문의 정보를 돈을 주고 사들인다는 건 알고 있지? 가격이 상당하다고 하던데. 시장에 나가본 메이드나 호위병이라면 모두 한 번쯤 들어봤을 걸….”

“그리고 네놈들은 그걸 알고 있으면서, 저택으로 돌아와 그 소식을 퍼트리고 있다? 아주 똑똑하군. 누가 더 악의를 가진 건지 모르겠어.”

레이저가 입꼬리를 말아 올렸다. 그의 냉혹한 눈빛에 호위병들이 얼어붙었다. 레이저의 지적에 할 말을 잃은 듯 반박조차 하지 못했다. 하지만 레이저는 그것만으로 부족하다고 생각했는지, 돌연 단검을 뽑아들더니 자신에게 가장 가까이 서 있던 호위병을 쓰러트려 제압했다. 칼날이 비늘 사이의 부드러운 살을 파고들었다.

“크아아악!”

호위병들이 하나 둘 뒤로 물러섰다. 무기를 뽑아 레이저와 맞서 싸워야할지 망설이는 듯했다.

일반적으로 도마뱀 일족은 반사신경과 스피드 모두 인간보다 우월했다. 하지만 레이저는 그들 중 누구도 알아차리기도 전에 한 명을 제압해버렸다. 그들은 본능적으로 두려움을 느끼며 조금도 움직일 생각을 못했다.

레이저는 비웃음을 흘렸다. 칼날이 살결 위를 휘젓자, 땅바닥에 깔린 도마뱀 일족은 용서를 비는 듯 신음소리를 흘려댔다.

“누구나 약점은 있다. 후안 가문도, 그리고 네놈들도. 그런데 궁금하군. 네놈들의 약점은 돈인가? 아니면 죽음인가?”

레이저는 미소를 유지하면서 그들의 반응을 지켜보았다. 그리고 자신의 경고가 저 입만 싼 놈들에게 각인되었다는 걸 확인한 뒤에야 자리에서 일어났다.

“내 귀에 다시 한 번 그따위 헛소리가 들려온다면, 그땐 네놈들 가죽을 모조리 벗겨주마.”

홀은 순식간에 기이할 정도로 정적에 휩싸였다.

레이저는 기쁘지 않았다. 오히려 근심만 늘어갈 뿐이었다. 여전히 그의 머릿속을 가득 채운 것은 덜덜 떨며 울음을 터뜨리던 도마뱀 소녀였기 때문이었다. 빌어먹을, 얼른 정신 차리란 말이다. 그가 속으로 그렇게 소리친 게 도대체 몇 번째인지, 스스로도 알 수 없었다. 소녀의 면전에 고함을 치며, 그녀를 억지로라도 홀로서기를 할 수 있는 전사로 만들고 싶었다.
 

ㅡ곧, 후안 가문에 진정한 시험이 다가올 테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