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이애나의 발걸음이 멈췄다.

그녀는 꼬리를 흔들면서 한참 침묵에 잠겼다. 분노를 가까스로 참아내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무슨 이유 때문이든 레이저의 행위는 후안 가문에 대한 명백한 배신이었다. 아가씨가 화를 내는 것도 충분히 있을법한 일이라고 소녀는 생각했다.

하지만 다시 방안을 거닐기 시작한 다이애나는 소녀에게 전혀 예상하지 못했던 질문을 던졌다.

“그런데 왜 그렇게 하지 않은 거야?” “다, 당연히 거절해야죠!”

“흐음……하지만 날 떠났다면 네가 목숨을 버려야 할 필요는 없을 텐데.”

다이애나의 말투는 무척이나 차분해서, 마치 자신과 무관한 일에 대해 말하고 있는 것만 같았다.

소녀는 고개를 떨어뜨렸다. 아가씨의 말을 어떻게 해석해야 할지 몰라서, 그저 이렇게 결론을 내릴 수밖에 없었다.

“어쩌면 레이저가 제 생사를 걱정해서 그런 걸지도 모른다고, 그렇게 생각하기도 했어요……하지만 제가 떠나지 않았던 이유는 제 눈으로 직접 왕국의 미래를 보고 싶기 때문이었어요.”

“왕국의 미래라고?”

다이애나는 의문스러운 듯 눈썹을 치켜떴다.

소녀는 다이애나가 자신을 이해하지 못할 것이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래서 무릎을 꿇었다. 그것만이 다이애나를 존경하는 자신의 마음을 표현할 방법이었기 때문이었다.

“저는 아가씨가 수업 시간에 쓰셨던 모든 글들을 읽어봤어요. 아가씨는 사막왕국이 반드시 하층민들의 삶을 보살피고 이끌어야 할 것이라고 쓰셨죠. 또 빈민들이 안정적인 삶을 살 수 있도록, 배불리 먹을 수 있도록 도와줄 각종 정책에 대해 구상하셨던 것도 알고 있어요.”

소녀의 이야기를 듣는 것이 불편한 듯, 다이애나는 미간의 골이 더욱 깊어졌다.

“그래, 그렇게 쓴 적이 있지. 하지만 그건 모두 옛날 일일 뿐이야. 부모님은 내가 너무나 순진하고 현실을 모른다고 말씀하셨어.”

다이애나는 손으로 머리를 헝클어뜨리며, 살짝 껄끄러운 듯한 태도로 말했다.

“하지만 저는 그렇기 때문에, 진심으로 아가씨가 이 나라를 이끌어나가길 바랐어요.”

소녀는 눈을 내리깔았다. 여태껏 단 한 번도 이렇게 속마음을 털어놓아본 적이 없었기 때문일까, 그녀의 두 손이 살짝 떨려왔다.

“나라의 미래를 걱정하고 반성할 수 있는 아가씨라면, 아무리 바보 같은 저라도 한 가지만은 확실하게 알 수 있어요.”

“흐응?”

“저는 어린 시절 노예상인에게 납치됐어요. 다행히 도망칠 수는 있었지만 당장 길거리에서 죽는대도 누구도 신경쓰지 않는 떠돌이가 됐죠. 그런 제가 아가씨의 그림자호위병이 되었어요. 왕위쟁탈전에서 아가씨가 승리해 왕위에 오를 수 있도록 도울 수 있게 된 거예요. 저는 믿어요. 아가씨라면 반드시, 저 같은 신세에 처한 수많은 아이들을 구원해주실 수 있을 거라는 걸요.”

다이애나의 연보랏빛 피부가 마치 석양빛처럼 붉게 물들었다.

“날 너무 고평가하는 거 아냐?”

“아가씨는, 자신의 의무를 저버리지 않았잖아요.”

소녀는 깊게 심호흡하면서, 자신의 목소리가 나약하게 들리지 않길 바랐다.

“아가씨께서는 저택에 갇혀 계시는 동안에도 이 나라가 어떤 나라가 되어야 하는지에 계속 고민하셨고 머뭇거리지도 않으셨어요. 그런 아가씨라면, 분명히 최고의 여왕이 되실 수 있을 거라 믿어요.”

다이애나는 꼬리로 계속 양탄자를 두드리며, 어색한 표정으로 시선을 피했다.

“늘 그렇게 생각해왔던 거야?”

“아뇨, 제 생각이 맞았다고 확신한 것은 샤킬에게 납치당한 후부터였어요.”

소녀는 갈수록 한탄하듯 말했다.

“수많은 상인들과 귀족들이 우리나라를 버리고 다른 나라에 선을 대고 있었어요. 북방의 대지에, 동방연맹에, 그리고 태양왕국에 자신들이 살아남을 길을 찾으려고 온갖 노력을 기울이고 있었으면서, 자신들이 나고 자란 땅의 존망 따윈 알 바 아니라고 여겼죠.”

“당연한 일이야. 이 나라의 구조는 약자에겐 무척이나 무자비하니까.”

다이애나는 경멸하듯이 입꼬리를 비틀었다.

“재난이 닥치면 어미가 자식마저 잡아먹을 나라라고. 그자들이 사막을 떠날 궁리를 한다고 해도 원망할 수 없어.”

“그리고 그들은 후안 가문도 마찬가지가 아니냐고 했죠. 몰래 태양왕국과 교류를 하고 있으니 인간들을 그렇게 많이 고용하고 있는 게 아니냐면서요.”

“대꾸할 가치도 없는 비방이네. 우린 아인이든 인간이든 능력에 따라 일을 시키는 것일 뿐이니까.”

“네……. 제가 아가씨의 뜻을 이해할 수 있어서 감사할 뿐이에요. 이런 말이 아가씨에게 도움이 될지는 모르겠지만, 전, 단 한 번도 아가씨가 가문의 장기말이라고 생각한 적이 없어요.”

다이애나는 가볍게 코웃음치곤, 계속 창밖을 바라보았다. 밤바람이 방안의 공기를 차갑게 식혀주었다. 팔짱을 낀 다이애나는 의연한 표정을 짓고 있었지만 어딘가 어색해보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