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레이저가……그 일 때문에 후안 가를 떠날 수도 있을까요?”

소녀는 두려운 목소리로 물었다.

“왜 굳이? 태양왕국에서 온 첩자들은 모두 죽었잖아?”

다이애나가 귀찮다는 듯 반문했다.

“그건 그렇지만…….”

“그럼 된 거 아냐? 레이저는 귀찮은 일을 처리했고, 넌 살아남았고, 그리고ㅡ”

그때, 갑자기 레이저가 문을 열고 들어왔다. 다이애나는 비밀문 앞에 선 그를 돌아보았다. 그녀는 득의양양한 미소를 지으며 그를 맞이했다.

“나한텐 무기가 생겼지. 덕분에 당분간 새로운 호위병을 찾을 필요가 없어졌어. 모두가 행복한 결말이잖아?”

조용히 다이애나와 시선을 주고받은 레이저는 피곤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아가씨. 너무 오랫동안 자리를 비우시면 시녀들이 의심할지도 모릅니다.”

“이제 갈 거예요.”

다이애나는 머리를 매만지며, 방을 떠나기 전 레이저를 힐끔 곁눈질했다.

“무작정 감싸기만 하면 곤란해요. 쟤 혼자 그림자호위병 역할을 맡기엔 한참이나 부족하다구요. 책임지고 잘 훈련시키세요.”

“명령대로 따르겠습니다, 아가씨.”

 다이애나는 치맛자락을 움켜쥔 채로 힘껏 비밀문을 닫곤, 총총걸음으로 자신의 방으로 돌아갔다. 레이저는 그제야 소녀를 돌아볼 수 있었다. 그는 소녀의 당황한 눈빛에서 방금 전까지 무슨 일이 있었는지 알 수 있었다.

“아가씨께 무슨 말을 하셨던 거예요?”

“모든 걸 밝혔지.”

레이저는 최대한 담담한 어조로 말했다.

“그렇지 않았다면 내 말을 믿지 못했을 거다.”

‘모든 걸 밝혔다’라니. 그 모든 것은 어디까지일까? 태양왕국과의 일은 물론 레이저의 과거까지 밝혔을까? 아니면 그것보다 더 많은 이야기를 했을까? 소녀는 레이저에게 묻고 싶었지만, 지금은 그런 걸 묻기 적절한 시간이 아니라고 생각했다.

레이저도 그런 소녀의 생각을 눈치챘는지, 느긋하게 화제를 돌렸다.

“자세한 사정은 몰라도 돼. 어차피 아가씨는 널 위로하기 위해 왔던 것뿐이니까.”

“따귀를 때리셨는데요?”

소녀는 경악한 얼굴로 고개를 치켜들었다.

“조금 왜곡된 관심이라고 생각해라.”

남자는 팔짱을 끼며, 태연한 모습으로 어깨를 으쓱였다.

“어쨌든, 이렇게 된 이상 지금이 최선의 결과다. 이제 안심해도 좋아.”

“전 아직도 잘 모르겠어요. 아가씨의 심기를 거스른 것 같다는 생각이 들 때도, 어쩔 땐 화를 내지 않으시기도 해요. 어째서 갈수록 아가씨의 생각을 알아내기 힘든 걸까요…….”

소녀는 곤란한 표정으로 뺨을 만지며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그럴 법도 하지. 넌 가장 중요한 사실을 간과하고 있잖아.”

“그게 뭔데요?”

깜짝 놀란 소녀는 귀를 쫑긋 세웠다.

“똑똑한 사람은 오만하기 마련이라고.”

레이저는 입꼬리를 치켜올리며 다이애나를 향해 소소하게 반격을 했다.

“……선생님.”

“나도 이만 가봐야겠다. 오후에 수업 있는 거 잊지 마라.”

남자는 손을 흔들며 떠났다. 방에 남은 것은 소녀뿐이었다. 소녀는 비밀문에 몸을 기댄 채, 몰래 바깥에서 들려오는 소리를 엿들었다. 다이애나 아가씨가 레이저에게 신경질적으로 으르렁댔고, 다른 시녀에게 심부름을 시키는 목소리가 들렸다. 소녀는 텅 빈 방을 둘러보았다. 방안엔 여전히 두 사람이 남기고 간 체취가 남아 있었다. 순간, 이 작은 공간은 더 이상 적막하지 않았다.

만일 그때 후안 가를 떠나기로 결정했다면, 그녀는 두 번 다시 레이저를 만나지 못했을 것이다. 그는 분명 안심하며 조용히 소녀의 인생에서 사라졌을 것이고, 다시는 소녀를 찾지 않았을 테니까.

그래서일까, 후안 가에 남기로 한 결정은 어느 정도 사심이 섞여 있었다고 해도 좋았다.

“레이저…….”

소녀는 고개를 숙인 채 자신의 기형적인 손을 바라보았다. 어린 시절 망가져 기괴하게 뒤틀린 새끼손가락을.

뭐라 말로 표현하기 힘든 감정에 목이 막혀왔다. 소녀는 눈을 감고는 조용히 남자의 이름을 부르며, 지금 이 순간 머릿속을 가득 채운 생각들을 온 힘을 다해 느꼈다. 그것은 누구에게도 말할 수 없는 비밀이었다. 사랑? 아니, 그것은 사랑보다 더 큰 무언가였고, 신앙심에 가까운 감정이었다. 그 신앙심의 대상은 레이저이기도 했고, 다이애나이기도 했으며, 그리고 이 나라의 미래를 건 전쟁이기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