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아이는 떠났어요.”

다이애나의 부름을 받은 레이저가 방에 들어오자마자, 그녀는 단도직입적으로 말했다.

말뜻을 이해했음에도 그의 표정은 변하지 않았다. 그러나 그는 조심스럽게 자신의 앞에 서있는 소녀가 누구인지를 확인하고자 했다. 곧, 그는 자신이 마주하고 있는 게 진짜 다이애나 아가씨라는 것을 깨달았다. 그런 상대방을 밀어내는 듯한 도도한 태도는 소녀가 따라할 수 없는 종류의 것이었다.

“아가씨가 내보내신 겁니까?”

“공을 세우고 싶어 해서 기회를 줬죠. 항구에 잠입시켜 일프 측 내부 상황을 파악하도록 했답니다.”

다이애나는 등받이에 몸을 기댔다. 그녀의 말투는 나이에 맞지 않게 침착하고 예리했다.

“뭔가 하고 싶은 말이 있나요, 레이저?”

“아가씨의 결정이시니 저는 따를 뿐입니다.”

“호, 좋아요. 그럼 이제 가보도록 하세요.”

다이애나는 어깨를 으쓱였다.

레이저는 한발자국도 움직이지 않았다. 대신 느긋하게 입을 열었다.

“허나, 이 일로 아가씨의 명성에 영향을 주게 된다면, 저는 가주님께 질책을 받을 수밖에 없습니다. 그 ‘다이애나’는 아직 제몫을 다하지 못합니다. 만일 그 아이가 아가씨의 얼굴로 무슨 일이라도 저지른다면 모든 가문들이 경악을 금치 못하겠지요. 그렇게 되면 아무리 저를 저택 바깥으로 보내신다 할지라도 문제를 해결할 수는 없을 겁니다.”

다이애나는 미소를 띠었다. 마치 그런 반응을 기다리고 있었다는 듯.

“그 애가 정체를 들켜도 상관없어요.”

“이해하지 못하겠습니다. 그건 아가씨께 아무런 도움도 되지 않습니다.”

“당신 말대로라면, 일프는 장차 대공의 자리에 앉아 왕국의 경제를 장악하고, 이를 이용해 왕실의 미래를 조종하려고 한다는 건가요? 아니면 태양왕국의 첩자인 그자가 왕위 쟁탈전에 끼어들었다는 말인가요? 후자의 경우라면 무척이나 심각한 상황인 것 같은데요.”

다이애나는 자리에서 일어나 우아하게 긴 꼬리를 흔들었다.

“그게 사실이라면, 다이애나에게 완벽하게 닮은 그림자호위병이 있었다는 소식은 조금도 중요하지 않은 정보가 될 뿐이죠.”

레이저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었다. 더 이상 냉정을 유지할 수 없게 된 그는 얼굴을 잔뜩 찌푸렸다.

“아가씨는 그 아이를 이용해 뭘 하시려는 겁니까?”

“걔가 어떤 증거도 찾지 못한대도, 뭐, 증거는 만들면 될 뿐이죠.”

다이애나가 팔짱을 끼며 말했다.

“모든 준비는 마쳐뒀답니다. 걔가 성공하든 실패하든, 일프는 이번 왕위 계승전의 적이 될 거예요. 그 기회를 이용해 혼란을 조장하고, 왕위계승전의 규칙도 바꿀 수 있겠죠. ㅡ예를 들면, 태양왕국과의 내통은 아주 좋은 핑곗거리죠.”

“……하지만 그 대가로 아가씨의 그림자호위병은 목숨을 잃게 되겠지요.”

피어오르는 무력함을 억누른 레이저는 자존심을 죽이고 고개를 푹 숙였다.

“저도 항구로 갈 수 있도록 허락해주십시오. 아가씨의 계획이 차질 없이 진행되도록 돕겠습니다.”

“필요 없어요. 당신 임무는 저택 안에서 저를 지키는 거니까요.”

다이애나는 승리했다는 듯한 미소를 지으며 턱을 괴었다.

“여기에 무슨 문제라도 있을까요?”

“그렇습니다. 아가씨는 대체 어째서 제게 이런 사실을 알려주시는 겁니까?”

다이애나는 여전히 미소를 유지했다. 하지만 무정하도록 차가운 목소리가 그녀의 얼굴을 더욱 잔혹하게 비추었다.

“어떤 일이 있었죠. 당신은 그 애만 가르친 게 아니라 제게도 교훈을 줬어요.”

그녀는 자신의 목을 어루만졌다. 레이저로 인해 상처가 생겼던 곳엔 아무런 흔적도 남아 있지 않았지만, 손으로 만질 때면 여전히 이질감이 느껴졌다.

“그건ㅡ!”

“당신도 알고 있겠죠. 우리 부모님은 지금까지 살아남은 가문들 중 가장 미약한 세력이라는 걸. 후안 가가 쥐고 있는 패는 그리 많지 않아요. 그렇다면, 다른 후보자들의 행보를 어떻게 방해하느냐가 가장 중요하죠.”

그녀의 눈빛에서 음산한 기운이 뿜어져 나왔다.

“살아남는 것보다 우선시할 수 있는 것은 없어요. 왕국의 미래는 차후의 문제예요, 레이저. 생존이야말로 가장 중요한 문제라고요. 당신과 저는 같은 부류의 사람이에요.”

레이저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다이애나가 자신을 신뢰하지 않는다는 것은 알고 있었다. 과거 그림자호위병의 교육을 맡았던 자들이라면 모두 겪었던 문제였던 데다, 자신은 극단적인 소문의 당사자인 인간이기까지 했으니 당연한 일이었다. 하지만 그럼에도 소녀를 보호하기 위해 후안 가의 사람들에게 충성을 바쳐왔다. 그런데 바로 지금 다이애나가 훼방을 놓으며 소녀의 목숨을 가지고 행패를 부릴 줄이야.

레이저는 주먹을 움켜쥐었다. 더 이상 이성으로도 내면의 광기를 억누를 수 없을 것 같았다. 그는 힘껏 이를 악물며, 쇳소리가 섞인 목소리로 말했다.

“제가 뭘 해주길 바라시는 겁니까.”

다이애나는 터져나오려는 감정을 꾹 누르며, 여전히 차가운 얼굴을 유지했다.

“여기에 남으세요. 아무 데도 못 가요.”

레이저는 머뭇거리지 않았다.

힘껏 문을 열어젖힌 그는 인사도 없이 재빨리 복도로 나섰다.

바로 그때, 다이애나는 레이저의 속마음을 드디어 깨달을 수 있었다. 아니, 드디어 그동안 품고 있었던 의문에 확신이 들었다고 하는 게 맞으리라.

‘레이저는 후안 가문을 위해서가 아니라, 그 소녀를 위해서 일했던 거였어.’

모든 게 명백해진 뒤, 다이애나는 자신도 모르게 손을 꽉 움켜쥐었다. 마치 보이지 않는 밧줄을 잡아당기듯이.  “굳이…….”

그녀의 들릴 듯 말 듯한 속삭임이 레이저의 발걸음을 멈춰 세웠다.  “한 사람만을 위해서 일할 필요가 있을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