물을 마시는 동안 두 사람은 아무런 대화도 나누지 않았다. 너무나도 조용했다.

레이저는 아예 입을 꾹 다물고 있는 소녀를 바라보았다. 그리곤 더 이상 참지 못

하고 질문을 던졌다.

“오늘 수업 시간 도중, 정말로 아가씨를 연기하고 있던 거냐?”

그녀는 깜짝 놀라 물주머니를 움켜쥐었다. 차마 그렇다고 고개를 끄덕일 순 없

었다. 그녀는 긴장한 얼굴로 반문했다.

“왜 그렇게 생각하세요?”

“네 표정이 너무 편안해보였거든. 흉내 내는 것 같지 않았다.”

“……죄송해요.”

“뭐가?”

“제대로 아가씨를 연기하지 못해서요.”

“내 질문은 그게 아냐. 어째서 하사드 앞에서 그렇게 긴장이 누그러졌냐는 거

다.”

그녀는 초조해지기 시작했다. 레이저 앞에선 문책을 피할 길이 없었다. 제대로

대답하지 못한다면 레이저는 자신이 만족할 때까지 계속해서 되물을 터였다.

“하사드 선생님의 이야기가 너무 재밌어서요. 그리고……그분은 늘 친근하게

절 보듬어주셔서, 그래서……”

“하사드는 ‘네’게 관심을 두고 있나? 아니면 다이애나 아가씨에게?”

“같은 말이잖아요.”

레이저의 말에 그녀는 발끈한 듯 반박했다.

“흐음…….”

레이저는 잠시 골똘히 생각하다가, 소녀를 향해 손짓했다.

“가까이 와라.”

“네.”

소녀는 레이저 곁으로 다가갔다. 그리고 잔뜩 긴장한 얼굴로 그를 바라보았다.

그런데 그때, 레이저가 힘껏 소녀의 하반신을 걷어찼다. 무방비 상태였던 소녀는

완전히 균형을 잃은 채 땅바닥에 엎어졌다. 레이저의 손동작은 소녀를 속이기 위

한 페인트였다. 손만 바라보던 소녀는 다리는 생각지도 못하고 있던 탓에 입 안

가득 모래를 먹고 말았다.

“넌 머저리냐?”

그는 바닥에 쓰러진 소녀를 노려보았다. 높낮이 없는 목소리였지만 노기가 뚜

렷하게 느껴졌다.
 

“고작 사탕발림에 넘어가 경계심을 누그러뜨려?”

“꺄악!”

일어서려던 소녀는 레이저의 발길질에 다시 뒤로 넘어져 모래 위에 나뒹굴었

다.

“일어나라. 어떻게 공격당하더라도 곧바로 일어서라고 가르치지 않았나?”

“네…..네! 죄송합니다!”

소녀는 재빨리 발버둥치며 일어나 레이저 앞에 무릎을 꿇었다. 그리고 곧 이어

질 처벌을 덜덜 떨며 기다렸다. 레이저는 소녀를 쳐다보았다. 원래는 좀 더 손봐

줄 생각이었지만, 떨고 있는 모습에 한숨만 푹 내쉬었다. 그는 손에 힘을 빼곤 소

녀를 등지고 서서 사색에 잠겼다.

“너……”

손을 이마에 짚은 채 눈을 찌푸렸다. 그리고 위압감과 음침함이 느껴지는 잠긴

목소리로 말했다.

“고작 가주님이 따뜻하게 대해줬다고 자신의 목숨을 바치겠다고 결정한 것은

아니겠지?”

“가주님이요? 가주님하고는 아무 상관없잖아요.”

소녀는 고개를 치켜들며 레이저의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그의 말을 이해하지

못한 듯한 얼굴이었다.

“그래. 하지만 난 지금껏 네가 어째서 아가씨의 대역이 되겠다고 결정했는지 물

어본 적이 없다.”

“저는 가주님이 베풀어주신 은혜를 배신할 수 없어요. 그분들은 절 데리고 와 돌

봐주시고 키워주셨으니까요⋯⋯그분들에겐 제 목숨이라도 기꺼이 바칠 수 있어

요.”

소녀의 목소리는 어딘가 딱딱했다. 마치 미리 외워둔 답안을 읊고 있는 듯했다.

레이저는 짜증스러운 듯 눈을 찌푸렸다.

“역시 그랬군. 아직 세상 물정 모르는 꼬맹아. 순진하게도 이 세상이 널 해치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하기라도 하는 모양이구나. 잘 들어라. 그게 바로 너와 아가

씨가 다른 이유야. 아가씨는 이 세상 누구도 믿을 사람이 없다는 걸 아주 잘 알고

있지. 그런데 너는? 바보처럼 남이 내미는 손을 따뜻하고 친절하다고 착각하고

있잖아.”

레이저의 말이 소녀를 점점 억죄어댔다. 그녀는 물주머니를 꾹 움켜쥐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