몇 차례 검격을 주고받았을 뿐이었지만 레이저의 열세가 명백했다. 세 명의 인간은 약속이라도 한 듯 계속해서 위치를 바꿔가며 레이저의 움직임에 맞춰 검을 날렸다. 그러던 중 한 놈에게 공격을 허락한 레이저는 순간 자세가 흐트러졌다. 머리를 노리고 날아드는 비수는 가까스로 피했지만, 다른 두 명의 연이은 공격에 옆구리와 어깨에 상처를 입고 말았다.

상처는 깊지 않았다. 그러나 끊길 줄 모르고 날아드는 검격에 레이저는 식은땀을 흘렸다. 본능적으로 퇴각해야 한다는 생각이 머릿속을 가득 채웠다.

‘지더라도 살아 있기만 한다면 언제든지 기회는 있다.’

패배의 순간마다 그는 늘 그렇게 자신을 향해 속삭였다. 하지만, 이번엔 그럴 수 없었다. 소녀의 비명소리가 여전히 그의 귓가에 남아 그의 이성을 마비시키고 있었다.

도망칠 수도 없었고, 도망치지도 않을 것이다.

레이저는 샤킬과의 일전을 떠올렸다. 그자가 두 눈을 감은 채 본능에 따라 자신의 공격을 맞받아치던 모습을 생각했다.

단 한 번도 따라해본 적이 없었지만 그것이 어떤 감각인지는 잘 알고 있었다. 어쩌면 지금이야말로 그런 본능에 몸을 맡긴 싸움이 필요한 순간일지도 몰랐다.

소녀를 구해내지 못한다면 살아남는다 할지라도 아무런 의미도 없었으니까.

그렇기에 레이저는 적의 움직임에서 눈길을 뗐다. 그리고 자신의 의식을 한 점에 집중한 채 상대방의 공격이 자신의 급소를 노리고 날아드는 순간만을 포착했다.

머릿속이 순식간에 새하얗게 비어갔다.

그러나 동시에 공기의 흐름과 그 미세한 변화를 통해 적들의 움직임이 완벽하게 읽혔다. 본능적으로 손뼉을 치듯 두 손을 모았다. 자신을 향해 내찔러오는 칼을 든 손이 붙들렸다. 손목을 비틀고 무기를 빼앗은 뒤, 적을 땅바닥에 메다꽂았다. 레이저는 비틀린 손목을 붙잡은 채 살짝 힘을 주어 팔뼈를 부러뜨렸다.

“끄아악!”

땅바닥에 쓰러진 사내가 애처롭게 비명을 내질렀다.

그는 적의 빈틈을 노리고 철저하게 계산한 뒤 움직이는 스타일이었지, 육체적인 본능에 의존한 적은 한 번도 없었다. 그러나 반격에 성공한 순간 레이저 스스로도 의구심을 떨쳐낼 수가 없었다. 도마뱀 일족들은 전투할 때마다 이런 느낌이었던 걸까? 생각을 할 필요도 없었다. 적을 바라보지 않아도 몸이 어떻게 움직여야 할지 알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는 남은 두 사람을 돌아보았다. 놀랍게도 그들의 공격은 이제 더 이상 통하지 않았다. 손쉽게 공격을 막아낸 레이저는 곧바로 무자비한 반격을 날렸다. 모든 검격이 적의 취약점을 파고들었다. 몸속에서 격앙된 감정이 끓어올랐다. 마치 샤킬처럼. 그저 손끝을 적시는 따스한 핏물만이, 적의 목숨을 손끝으로 취할 때의 그 감각만이 그에게 만족감을 주었다.

‘단 한 번만이라면,’

그는 다시 괴물이 되기로 했다.

레이저는 시체들을 밟으며 등대 안으로 향했다. 그리고 꼭대기로 향하는 나선형의 계단들을 뛰쳐올랐다. 그 순간 등대 안에 매복해 있던 인간들이 온갖 구석에서 뛰쳐나와 좁다란 계단을 막아섰다. 레이저가 들어서길 기다리고 있었던 것 같았다.

일곱, 아니, 여덟……레이저는 적들이 얼마나 있는지 일일이 셀 시간이 없었다. 암기는 협소한 공간에서는 쓸모가 없었다. 그는 몸에 누적된 피로와 고통을 무시하고 온힘을 다해 응전했다. 정신을 다잡았지만 무기를 잡은 손은 서서히 흐릿해져갔다. 모든 것이 환상처럼 흐릿하게 변해갔다.  피곤하다.

살고 싶다.

아니, 차라리 죽고 싶다.  머릿속에서 비명소리가 울려 퍼졌다. 칼을 휘둘렀다. 적의 가슴을 내찌르는 소리가 나야 했다. 하지만 그 순간 그에게 들려온 것은 알이 깨지는 순간의 파열음이었다. 따스한 점액질과 부드러운 촉감이 자신의 손바닥 위에서 점점 차가워져갔다. 무척이나 손쉬운 일이었다. 그저 내면의 어둠속으로 걸어 들어가면 될 뿐이었다.

계산적으로 행동할 필요도, 이성적으로 생각할 필요도, 무언가를 이해할 필요도 없었다.

눈앞의 생명이 헐떡거리며 신음을 내뱉었다. 마지막으로 흘려낸 탄식이 허공 속으로 흩어져갔다. 그는 모든 감각을 무시하면서, 신속하게 다른 알을 집어들었다.

자신을 가로막는 모든 것을 제거하면 그만이었다. 무척이나 간단한 일이었다. 어쩌면 그는 파멸을 가져오기 위하여 이 세상에 태어난 것일지도 몰랐다. 오직 죽음. 그 밖의 모든 것은 생각할 필요가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