레이저는 장검을 빼들었다. 그것은 그가 가진 무기 중 숨길 필요가 없는 몇 안

되는 무기 였다.

“뛰어!”

레이저의 명령대로 그녀는 달리기 시작했다. 정체를 알 수 없는 검은 인영들이

먼지구름을 일으키며 빠르게 다가오고 있었다. 그들은 복면으로 얼굴을 가리고

있었고, 일부는 창을 일부는 시미터를 들고 있었다. 물열매나무 숲에 진입한 놈

들은 신속히 산개하며 몸을 숨긴 채 전진해왔다.

가슴이 미친 듯이 쿵쾅거렸다. 하필이면 지금 처음으로 적을 마주칠 줄은 몰랐

다. 지금까진 늘 레이저가 암살자들을 처리해왔기 때문이었다. 그래서일까, 진짜

적을 자신의 두 눈으로 목도한 순간, 그녀는 두려움 말고는 아무런 생각도 들지

않았다.

암살자들은 함부로 소리를 내지 않는 법이었다. 침묵 속에서 행하는 모든 행동

하나하나가 명백하게 살의를 띄고 있었다. 다섯 명은 바깥에서 안쪽을 향해 포위

망을 좁혀오면서 바닥에 일부러 꼬리를 힘껏 휘저어댔다. 그녀와 레이저를 향해

흐르는 바람을 이용해 흙먼지를 일으키려는 것이었다. 두 사람의 시야를 흐리게

만들어 제자리에 묶어둘 계획이었다.

레이저가 손으로 입과 코를 가리면서 크게 고함쳤다.

“따라 와! 내 뒤에서 벗어나지 마라!”

“레이저?”

그녀의 심장이 미친 듯이 뛰기 시작했다.

레이저는 이미 판단을 마친 듯, 흙먼지를 가르며 오른쪽으로 질주했다. 그리고

그들을 습격하려던 도마뱀 일족과 정면에서 마주쳤다. 소녀의 귓가에 냉병기가

맞부딪히는 소리가 울려 퍼졌다. 두세 번의 칼부림 끝에 레이저의 칼이 도마뱀

일족의 목을 그었다. 선혈이 튀어 올라 물열매나무 몇 그루를 흠뻑 적셨다. 소녀

는 비명을 내지르며 레이저의 등 뒤에 바싹 몸을 붙였다. 바닥에 쓰러져 있는 시

신을 도저히 바라볼 용기가 나지 않았다.

“준비해라.”

레이저의 지시에 소녀는 허둥대면서 옷 속을 뒤져 안에 숨겨뒀던 비수를 꽉 쥐

었다. 그건 특수한 재료로 단조된 예리한 단도로, 도마뱀 일족마저도 간단하게

상처 입힐 수 있는 물건이었다. 손끝에서 느껴지는 손잡이의 형태를 느끼면서,

그녀는 바짝 집중한 채 이어질 명령을 기다렸다.

시미터를 든 두 도마뱀 일족이 레이저를 향해 달려들었다. 다른 두 명은 접근하

는 대신 멀리 떨어져 레이저에게 창을 내던질 기회를 노리고 있었다. 소녀의 손

이 땀으로 흠뻑 젖었다. 잡고 있는 비수의 손잡이가 금방이라도 미끄러질 것만

같았다. 레이저는 여전히 아무런 명령도 내리지 않은 채, 두 칼잡이들과의 싸움

에만 집중하고 있었다.

놈들은 레이저보다 체격이 더 컸다. 하지만 그의 맹렬하고도 정확한 반격에 빈

틈을 보이고 말았다. 결국 그에게 주도권을 빼앗긴 채 속수무책으로 밀려났다.
 

그때, 창잡이가 기회를 포착했다. 레이저가 두 칼잡이 중 하나의 목을 베어낸 순

간, 소녀를 향해 창을 내던진 것이었다.

레이저는 이를 악물면서 혀를 찼다. 그리고 당장 뒤로 한 발 물러서며 소녀를 거

칠게 밀어냈다. 투창이 두 사람 사이에 내리꽂혔다.

빈틈을 노린 칼잡이가 칼을 휘둘렀다. 레이저의 비늘갑옷 위에 한줄기 균열이

생겨났다. 레이저는 균형을 잃고 쓰러지면서 한쪽 무릎을 꿇었다. 그 순간, 그가

고함을 내질렀다,

“3호!”

소녀는 레이저의 외침에 응답하듯 비수를 뽑아들었다.

그녀는 지금껏 이토록 집중한 적이 없었다. 주위의 모든 소리가 사라져버린 것

만 같았다. 손의 움직임이 느리게 보였다. 하지만 머릿속은 반대로 엄청난 속도

로 풍향과 적의 위치, 각도를 분석하기 시작했다. 그녀는 있는 힘껏 무기를 투척

했다. 늘 훈련받았던 그대로―비수는 무릎을 꿇은 레이저를 지나쳐 칼잡이의 미

간에 내리꽂혔다.

칼잡이는 무기를 내팽겨치곤 얼굴에 손을 감쌌다. 놈의 두 손에 피가 잔뜩 묻어

나왔다. 그때 소녀는 미친 듯이 뛰어대는 자신의 심장소리를 느끼고 있었다. 성

공에 도취된 흥분이었다. 자세를 가다듬은 레이저는 전광석화처럼 뛰쳐나갔다.

반짝이는 칼날이 흙먼지마저 갈라버린 것 같았다. 도마뱀 일족의 손과 머리가 동

시에 땅에 떨어져 내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