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됐다. 이해가 될 때까지 계속 여기서 물열매나 올려다보고 있던가.”

레이저는 포기한 듯 휙 몸을 돌려 걸어가기 시작했다.

“잠깐만요. 뭔가 더 알고 계신 거죠?”

순간 의심이 피어오른 소녀는 퍼뜩 정신을 차리고 남자의 뒷모습을 향해 소리쳤다.

“저도 알고 싶어요.”

레이저는 우뚝 멈춰 서더니, 껄끄러운 표정으로 그녀를 돌아보았다.

“왜? 여태껏 그런 건 물어본 적도 없었잖아.“

소녀는 드레스 자락을 움켜쥐었다.

“저도……뭔가 준비를 하고 싶어요.”

남자는 목울대가 꾹 눌린 듯한 목소리로 나지막하게 중얼거렸다.

“준비는 무슨. 날 믿지 못하는 거겠지.”

분노에 찬 레이저의 시선을 견디지 못한 소녀는 고개를 휙 돌렸다.

돌이켜 보면, 레이저가 후안 가에 들어와 전담교사가 된 이후부터 그의 가혹하고도 진지하며 신중한 태도는 늘 소녀를 괴롭혀왔다. 얼마나 시달렸는지 꿈속에서까지 훈련을 받다가 놀라서 깬 적도 있을 정도였다.

동시에 레이저는 늘 세심하게 소녀의 상태를 지켜보면서 그때그때 배워야 할 부분을 고쳤다. 소녀의 건강 상태를 늘 염두에 두었기 때문일 것이다. 그는 유연하지만 엄격한 방식으로 겨우 반년 만에 소녀를 빠르게 성장시켰고, 혼자서도 적을 상대할 수 있을 수준에 이르게 됐다.

선생으로서의 레이저는 흠집 하나 잡을 수 없는 자였다.

하지만ㅡ

소녀는 아직까지도 그날 밤 레이저의 고백을 잊을 수 없었다.

어떻게 그날의 일을 잊을 수 있을까. 레이저는 소녀에게 여태껏 단 한 번도 보여준 적이 없던 모습을 보였다. 마치 냉정을 잃은 것처럼, 소녀를 바라보는 그의 눈빛은 강렬하고도 간절했다. 이상했다. 그것은 사랑이라기보단 일종의 편집증 같았다. 자신도 어쩔 수 없어 그렇게 행동할 수밖에 없는 것처럼 보였다.

소녀가 레이저에게 겁을 먹은 건 그날이 처음은 아니었다. 하지만 그날, 소녀는 진심으로 레이저의 두 눈에 숨겨진 광기 앞에 공포를 느꼈다.

그녀는 결코 레이저를 믿을 수 없었다. 왜냐하면 소녀는 깨달았기 때문이었다. 샤킬이 방금 전 진심으로 자신을 죽이려고 했다는 걸.

아무리 허황된 말로 포장해보려고 했어도 소녀를 향한 샤킬의 호감은 겨우 그 정도뿐이었다. 그와 사투를 벌이던 순간 샤킬의 살의는 무척이나 진실된 것이었다. 그는 결국 자신의 본심을 드러낸 것이다. 임무와 목표를 위해 자신의 마음을 내버린 것이다.

레이저가 소녀를 향해 걱정하는 모습을 보이는 이유도 어쩌면 이와 비슷한 위장일지도 몰랐다. 그렇기에 그녀는 더욱 냉정을 유지한 채, 레이저가 후안 가를 위협할 가능성을 떠보고 있었다.

“제가 언제 선생님한테 그런 말을……”

“자기가 했던 말도 잊어버린 거냐? 그렇다면 나도 그때 했던 말을 취소하도록 하지.”

그는 그날처럼 버럭 화를 내는 대신, 그저 나지막하게 소녀의 말을 중간에 잘라내 버렸다. 다시 후드를 눌러쓰자 레이저의 두 눈에 드리운 음영이 더욱 어두워졌다.

“조금만 더 가면 우리를 도와줄 용병들이 있을 거다. 자신들이 모실 사람을 다이애나 아가씨라고 생각하고 있지. 그러니까, 넌 이제 안전하게 후안 가문으로 돌아갈 수 있다는 거다. 걱정하지 마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