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막왕국의 전통에 따르면 왕실에 속하는 가문들은 왕위 후보자를 올릴 수는 있으나, 이를 물러 경쟁을 포기할 수는 없었다. 대관식이 치러지기 위해서는 마지막까지 생존한 유일한 후보자가 대신관의 선언을 거쳐 왕위에 올라야만 했다. 그게 신생아든, 노인이든 상관없었다.

왕위쟁탈전 중엔 어떤 수단을 쓰더라도 적법하다. 즉 다시 말하자면, 후안 가의 다이애나가 살아남고자 한다면 다른 후보자들을 모조리 죽이는 것 외엔 다른 선택지가 없다는 뜻이기도 했다.

“이번 연회는 우리들을 지지하는 귀족과 상인들을 초청하기 위함이다.”

크무트가 이야기를 이어갔다.

“그리고 이번에 새로이 가담한 맹우들 역시 초청할 것이다.”

“그러니 다이애나는 꼭 연회에 참석해야 해. 맹우들이 직접 딸아이를 만나봐야 신뢰를 줄 수 있을 테니까.”

“그래, 그저 얼굴만 비추는 것만이라도 좋다.”

부부는 말을 주거니 받거니 하며 서로의 말을 이어갔고, 마지막엔 이구동성으로 입을 열었다.

“그러니 레이저. 이 아이가 그 일을 감당할 수 있으리라고 생각하나?”

식은땀이 났다. 온몸이 덜덜 떨렸다.

그들은 자신을 언급하고 있었다. 십수 개의 가문과 막강한 세력을 가진 자들이 모두 모이는 장소에, 다이애나를 대신해 자신을 내보내겠다는 것이었다. 그저 연회장의 중심에 서서, 모든 이들에게 자신의 목소리를 들려준다는 상상만 했을 뿐인데도 다리에 힘이 풀릴 지경이었다.

레이저는 가주 내외의 질문을 이미 예상하고 있었던 모양이었다. 그는 두 눈을 감았다. 대답은 망설이지 않고 흘러나왔다.

“아뇨, 너무 이릅니다.”

소녀는 오히려 그 말이 자신에게 더욱 상처가 될 줄은 몰랐다.

“그런가.”

그도 그럴게 가주 내외가 고개를 숙인 채 무언가 상의하는 듯 중얼거리기 시작했던 것이다. 그게 오히려 그녀를 더욱 두렵게 했다. 그녀는 몇 년 전 후안 가에 들어와 온갖 교육을 받았지만, 정작 가장 중요한 전투 훈련은 여전히 통과하지 못했다. 만일 자신이 끝내 쓸모없다는 평가를 받게 된다면, 두 사람은 무슨 반응을 보일까?

“잠깐만 기다려주세요, 저, 제가 좀 더 노력해보겠…..”

그녀는 자신에게 주어진 기회를 잡고자 했지만, 부부는 그녀의 말을 끊었다.

“무척이나 중요한 사안이다. 사소한 오점일지라도 최대한 피해야 해.”

크무트가 고개를 저었다.

“게다가 손님들도 무슨 마음을 품고 참석할지 모를 일이란다.”

잉겐이 거들었다.

“너를 시험하고자 하는 것은 우리가 아니라ㅡ”

“바로 그들이야.”

그녀는 풀이 죽은 채로 몸을 숙이며 무릎을 꿇었다.

“일깨워주셔서 감사합니다. 한시라도 빨리 두 분께 도움이 되도록 노력하겠습니다.”

부부는 미소를 지었다. 그들은 소녀의 말을 부정하지 않았으나, 칭찬하지도 않았다. 어쩌면 그것은 그녀에게 부담을 주기 위해서인지도 몰랐다. 어찌 됐든 반년은 길지도, 짧지도 않은 시간이었다. 왕위쟁탈전은 현재진행형이었고, 훈련을 일찍 끝낼수록 후안 가문의 계획도 더욱 공고해질 것이었다.

“레이저, 앞으론 다이애나의 호위를 맡아주게. 대역 훈련 역시 물론 중요하지만, 이제 연회가 코앞이야. 조금이라도 문제가 벌어지는 건 절대 바라지 않아.”

“분부대로 하겠습니다.”

“그럼 부탁드려요. 아, 말이 나왔으니 말인데,”

잉겐이 갑자기 떠오른 듯이 가볍게 입을 열었다.

“아직 음식이 남았단다, 3호야.”

”아……!“

너무 오랫동안 불려본 적 없던 이름이었기에, 그녀는 놀라서 벌떡 일어나고 말았다.

”우리 가문에 와서 다이애나의 대역이 되어주어 너무 고맙구나. 쉽지 않은 임무였을 텐데.“

정신을 차리지 못해 대답하는 것도 거의 까먹을 뻔 했던 그녀는 가까스로 대답했다.

“두 분이……제게 내려주신 은혜와 가르침은……제 목숨으로도 모두 갚지 못할 거예요. 후안 가문이 절 필요로 하신다면, 기꺼이 두 분을 위해 이 목숨을 쓰도록 하겠습니다.”

“후안 가문에 너와 같은 충성스러운 하인이 들어온 것은 정녕 뱀신의 보우하심 덕분이구나. 네 의무를 다한다면 우리 역시 그에 대해 응분의 대가를 내리겠다.”

크무트의 눈빛은 어딘가 따뜻했다. 그럼에도 여전히 목소리는 엄격함을 잃지 않았다. 가주를 바라보던 그녀는 감동한 듯 몸을 더욱 낮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