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녕하세요, 레이저 씨. 바깥이 꽤 소란스럽군요.”

“지금 가주님께서 로비에 계셔서 말이오. 아가씨를 방에 모셔다드리고 왔는데,

당신에게 물어보고 싶은 게 있어서 찾아왔소.”

레이저가 문을 닫자 바깥에서 새어들던 빛이 가려졌다.

“선생께서 다이애나 아가씨께 왕위와 관련된 질문을 던졌길래. 그러니, 궁금하

더군. 당신은 아가씨의 답변에 아무런 문제가 없다고 생각하시오?”

“아가씨의 호위병께서 그런 문제를 궁금해 하실 줄은 몰랐는데……. 당신은 다

른 생각을 갖고 계신 듯하군요.”

레이저는 어깨를 으쓱이더니 하사드를 향해 몇 발자국 다가섰다,

“아가씨의 발상은 흥미롭소. 하지만, 그분은 아직 순진하시지.”

“그 말은?”

“죄업 따윈 얼마나 짊어지든 상관없다는 자가 왕위에 오른다면, 그 자가 벌일 일

은 정상적인 윤리도덕에 완전히 어긋날 수도 있다는 말이지. 아가씨의 이론대로

라면, 왕이란 존재는 세상을 파멸시킬 존재를 낳을 수도 있다는 걸 암시하는 것

이오.”

“그건 평범한 사람이 떠올릴 법한 생각이 아니잖습니까.”

“평범한 자는 왕이 될 수 없소.”

레이저는 비웃음을 흘렸다.

“그뿐인가? 대부분의 사람들은 자기의 죄악을 반성할 줄도 모르지. 더 끔찍한

것은, 자신들이 벌이는 짓이 죄악이라고 여기지도 않는다는 거요. 죄악이 없다면

속죄도 필요 없지. 그렇지 않소, 하사드 선생?”

“……제가 그런 사람이라는 겁니까? 아니면 당신이 그런 사람이란 겁니까?”

하사드는 꼬리를 늘어뜨렸다. 바닥에 닿은 꼬리가 천천히 꿈틀거렸다. 경계심

이 가득한 움직임이었다.

레이저는 웃음을 터뜨렸다.

“큭, 이제야 진면목을 드러내셨군.”

“전 그저 당신의 도발적인 발언을 맞받아쳤을 뿐입니다. 그럼 이만.”

“지금은 도망치기엔 너무 늦었소, 도마뱀 형씨. 난 진작부터 당신을 지켜보고 있

었지.”

레이저가 다시 몇 발자국 다가와 하사드 곁에 섰다.

“나는, 남을 관찰하는데 아주 능숙하지. 손짓이라던가, 옷차림이라던가, 얼굴 표

정이나 움직임 같은 것 말이야……. 남을 관찰하는 자가 관찰 대상을 바라보는

시선은 평범한 자의 시선과 완전히 다르지. 그런데 아가씨가 무슨 행동을 보일

때마다, 당신은 그런 세세한 부분까지 특별하게도 눈여겨보고 있더군.”

“아니, 그건 그저ᅳ!”

“책을 내놔.”

그는 도마뱀 일족 앞에 서서 손을 내뻗었다.

하사드는 자기도 모르게 책을 움켜쥐었다.

“무슨 책 말입니까?”

“모든 책. 함께 차근차근 책을 넘겨보자고. 부디 책 속에 어떤 기호를 적어 넣었

거나, 있어선 안 되는 문서를 끼워 넣는 멍청한 짓은 하지 않았길 바라지. 만약 책

에서 당신의 죄를 증명할 증거를 찾지 못한다면……그땐 놓아드리도록 하지.”

하사드는 잠시 망설이더니, 들고 있던 교재를 모두 넘겨주었다.

하지만 레이저가 받아드는 순간, 하사드는 종이와 책을 몽땅 레이저의 얼굴에

내던졌다. 그는 전광석화처럼 황급하게 문을 박차고 교실을 뛰쳐나갔다.
 

레이저는 하사드가 진작 그렇게 나올 걸 예상하고 있었다. 하지만 역시 도마뱀

일족 특유의 민첩함과 반응속도를 따라갈 순 없었다. 레이저는 이를 갈며 널부러

진 책들을 걷어차버리곤, 문을 벌컥 열었다. 하지만 하사드는 이미 시야에서 사

라진 뒤였다. 그때 문밖에 있던 시녀 두 사람이 레이저의 표정을 보자마자 즉시

손을 내뻗어 한쪽 방향을 가리켰다.

“저쪽 복도로 갔어요!”

깜짝 놀란 시녀가 벽에 바싹 붙은 채로 소리쳤다.

“대문 쪽이 아니에요. 그자가 엄청나게 빠르게ᅳ!”

“가주님은 아직도 로비에 계시나?”

레이저가 소리쳤다.

“당장 가주님께 달려가. 병력을 소집하라고 일러.”

“네……네!”

시녀들은 치맛자락을 움켜쥔 채 달렸다. 고함소리가 그들이 방금 지나쳐왔던

로비 쪽에서 들려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