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음날, 아직 해가 뜨기도 전에 시녀장은 소녀를 깨웠다.

소녀는 비몽사몽 중에 시녀장의 도움을 받아 다른 하인들이 입는 허름한 외투와 머릿수건을 둘렀다. 머릿수건은 머리카락 말고도 코와 입까지 가릴 수 있을 정도로 길었다. 외투 아래엔 움직임이 편한 바지를 입었고, 만일을 대비해 암기 몇 자루와 도구도 함께 챙겼다. 여태껏 입고 있던 옷들과 달리 무척이나 무거운 옷차림이었지만 덕분에 겉모습만으로는 그녀의 정체를 알아차릴 수 없었다.

“주소예요.”

시녀장은 그녀에게 작은 양피지를 건네주었다.

“적힌 내용을 외우면 바로 없애버리세요. 잠시 후 심부름을 나갈 하인과 함께 바깥으로 나가게 될 거예요. 시장에 도착하면 자유롭게 움직여도 좋아요. 해가 지면 옆문으로 들어오면 되고요.”

“이건 항구의…….”

소녀는 자기도 모르게 중얼거리다 황급하게 입을 다물었다. 그건 분명 항구에 위치한 일프의 사무실 위치였다. 후안 저택에서 출발해도 고작 한 시간 거리였으니 시간은 충분했다.

소녀의 심장이 거세게 뛰었다. 저택을 나서는 순간에도 그녀는 흥분을 감추지 못했다. 다시 생각해보니 이건 레이저의 명령 없이 움직이는 첫 번째 임무이자, 다이애나 아가씨가 직접 그녀에게 내린 임무이기도 했다. 즉, 무엇보다 중요한 일이라는 뜻이었다.

그녀는 다른 하인들과 함께 때마침 장이 열릴 시각에 맞춰 시장에 도착했다. 여전히 새벽하늘엔 어스름이 깔려 있었지만 시장은 태양보다 먼저 활기를 띠었다. 수많은 상인들이 끊임없이 소리치며 호객행위를 시작했다. 하인들은 소녀를 신경쓰지 않았다. 애초부터 그녀와 동행한 적이 없었다는 듯 그들은 시장 안쪽으로 향하며 주방에서 필요한 각종 식자재들을 사들이기 시작했다. 그녀는 코를 매만지면서 바쁘게 움직이는 주변의 광경들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서둘러 항구 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멀리서 바닷바람이 불어오고 생선비린내가 느껴지는 걸 보면, 항구는 시장과 멀리 떨어지지 않은 곳에 위치해 있었다. 그녀는 석판이 깔린 길거리를 거닐었다. 온화한 바람이 주변 공기를 기분 좋게 데우고 있었다. 비가 드물게 내리는 사막왕국이었지만 항구와 가까운 이곳은 마치 바닷물에 흠뻑 젖은 것처럼 느껴질 정도였다.

거리는 건물들이 일렬로 죽 늘어서 있었다. 네모반듯한 건물도 있었고, 꼭대기에 아름다운 돔이 지어진 건물도 있었다. 건물들의 담장엔 규칙적으로 반복되는 문양들로 빼곡이 채워져 있었으며, 공공건물들의 출입구는 아치형 문으로 되어 있어서 사람들이 자유롭게 드나들 수 있도록 개방되어 있었다.

소녀는 숨을 깊게 들이마셨다. 더없이 익숙한 공기였다.

후안 가문에 들어온 이후 그녀가 시장에 와본 횟수는 손에 꼽을 수 있을 정도였다. 하지만 이곳은 조금도 변하지 않았다. 몇몇 가게는 없어지고 새로 생겼지만, 소녀가 길거리를 알아보는 데는 아무런 지장도 없었다. 소녀는 속으로 주소를 되새기면서, 인파가 점점 많아지는 석판대로 대신 건물들 사이로 난 협소한 뒷골목 사이로 걸음을 옮겼다. 소녀에겐 이 거리의 벽돌 하나, 기왓장 하나마저 모두 익숙했다. 과거 길거리 생활을 했던 그녀는 거리의 골목길을 구석구석 꿰뚫고 있었다. 뿐만 아니라 어디서 벽을 타고 올라가면 맞닿아 있는 건물들 지붕 위를 넘나들 수 있는지도 알고 있었다. 그러면 순찰대와 경비병들의 이목을 피하면서 목적지까지 순식간에 도착할 수 있었다.

소녀는 인적이 없는 골목에서 치마를 벗어 안에 입고 있던 움직이기 편하고 몸에 딱 붙는 바지를 내보였다. 치마는 밧줄 형태로 꼬아 허리에 둘러두었다가, 지붕 처마에 튀어나온 장식물에 거는 식으로 사용했다. 소녀는 한쪽이 무너진 담벼락을 가뿐히 넘어갔다. 두세 번 정도 그렇게 반복하자 그녀는 한 건물의 옥상 위에 도착할 수 있었다.

소녀는 물색으로 칠해진 일프의 사무실 건물을 찾아냈다. 다른 곳들과 별다를 바 없는 2층 높이의 건물이었다. 하지만 건물에 칠해진 색깔과 문양은 눈에 크게 띄진 않지만 고고한 아름다움이 돋보였다. 그녀는 다른 건물의 지붕에 서서 아래를 살펴보았다. 입구 쪽에는 도마뱀 일족 경비병 두 명이 지키고 있었다. 소녀는 조심스레 일프의 사무실 지붕으로 뛰어넘어간 뒤, 지붕에 늘어선 환기창에 조각된 아름다운 문양을 만지작거렸다. 사람이 들어갈 수 없는 구멍이었지만 그곳을 통해 건물 안쪽을 훔쳐보기는 충분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