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녀가 홀을 지나쳐 빠져나가려는 그때, 어느 방에선가 말소리가 계속 들려왔다. 문밖엔 할리파 가문의 수행원과 가신들이 지키고 서 있었다. 소녀는 조용히 지나치려고 했지만, 자기도 모르게 문 앞에서 발걸음을 멈추고 말았다.

“가주님 상태는 좀 어떤가요?”

수행원들은 다이애나가 굳이 시간을 내어 병문안을 와줄 줄 몰랐다는 듯 깜짝 놀란 표정을 지었다.

“찾아주셔서 감사합니다, 아가씨. 가주님께선 괜찮습니다.”

괜찮다곤 말했지만 뭔가 분위기가 심상치 않았다.

소녀는 곤혹스러운 표정을 지으며 눈살을 찌푸렸다.

“들어가서 가주님을 뵈도 될까요?”

“그렇게 해주신다면 저희 가주님도 기뻐하실 겁니다.”

소녀는 방에 들어섰다. 침대에 누워 있던 할리파 가의 가주 말고도 부상을 입고 바닥에 누워 있는 몇몇 가신들이 눈에 들어왔다. 바닥엔 모포를 깔려 있어서 조금이나마 편하게 쉴 수 있도록 배려해둔 것 같았다. 그런데 가주 곁엔 수흐 가에서 온 가신들도 서 있었다. 방금 전까지 무슨 이야기인지 끊임없이 말을 주고받던 중이었다. 다들 무척이나 심각한 표정이었고, 분위기도 좋지 않았다.

그들은 다이애나가 방에 들어오자마자 모두 입을 다물었다.

“할리파 가의 가주님을 보러 온 거예요.”

사람들이 이상할 정도로 경계 태세를 취하자, 살짝 놀란 탓인지 소녀도 조금 딱딱한 목소리로 말했다.

“죄송합니다, 다이애나 아가씨. 아가씨께서 오실 줄 몰라 무례를 저질렀습니다. 원래 저희는 그렇게 하지 않으니까요. 그러니까, 패자를 위문하는 것 말입니다.”

소녀는 어느 쪽 가문의 가신이 말한 것인지 알 수 없었다.

“알고 있어요.”

그녀는 이곳에 오기로 한 결정을 후회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연회 주최자로서 모든 손님들의 상태에 대해 관심을 가질 필요가 있죠.”

일반적으로 연회를 주최한 자는 부상당한 자에게 관심을 가져선 안 됐다. 그런 동정심과 연민이 종종 연약함으로 오해받을 수도 있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오히려 주인이 직접 나서서 부상자들을 모욕하거나 죽여 버리는 일도 매우 흔하게 벌어졌다.

그 점은 소녀도 알고 있었지만, 그렇게 할 수는 없는 일이었다.

그래도 가신들은 여전히 의아하면서도 곤혹스럽다는 표정을 지으며 전전긍긍했다.

“아가씨의 마음은 달게 받겠습니다. 하지만, 저희는 패자일 뿐입니다.”

“……그런가요. 실례했군요.”

소녀는 뒤로 한 발짝 물러섰다.

“가주님은 이제 막 고비를 넘으시고 안정을 취하고 계십니다.”

다른 가신 하나가 갑자기 입을 열어 그녀를 멈춰 세웠다.

“하지만 여전히 잠자리가 불편하신 듯합니다. 아가씨께서 가주님을 위해 기도해주신다면, 꿈속에서라도 뱀신의 가호를 받으실 수 있지 않겠습니까?”

잠시 머뭇거리던 소녀는 침대 곁으로 다가가 할리파 가의 가주를 바라보았다. 온몸이 상처투성이였다. 시녀장의 처치를 받아 붕대로 동여맨 곳이 한두 군데가 아니었다. 그녀는 자주 쓰는 기도문을 읊조리며 그의 얼굴을 살폈다. 그가 부디 악몽을 이겨낼 위안을 얻길 빌었다.

소녀가 환자를 돌보는데 정신이 팔려 있던 사이, 뒤에서 누군가 신속하게 접근해 등 뒤에서 그녀를 꽉 껴안았다. 비명을 내지르기도 전에 손수건으로 코를 틀어막았다. 진하고 달콤한 냄새가 콧속을 파고들자 소녀의 정신이 혼미해져갔다.

“누워 있던 놈들은 모두 죽여라.”

정체모를 자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도울 의사가 없는 놈들도 모두 죽여. 다들 이견은 없겠지?”

혼란에 빠진 소녀는 다른 자들이 뭐라고 대답했는지도 듣지 못했다. 그저 한 도마뱀 일족이 가주를 향해 다가서는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곧이어 고통어린 단말마가 들려왔다. 차마 그 장면을 지켜볼 수 없던 소녀는 눈을 질끈 감고 말았다.

“기도 따위보단 이편이 악몽에서 깨는데 더 도움이 될 거다.”

소녀를 붙잡은 도마뱀 일족이 비웃음을 흘렸다.

소녀는 할리파 가문의 가신들이 자신들의 가주에게 이런 식으로 행동할 줄 몰랐다. 그 목소리는 너무나도 냉혹하게 들려서 가슴이 찔린 것처럼 아파왔다. 주체할 수 없는 슬픔에 눈물이 흘러내렸다.

곧 그녀는 두 눈을 감았다. 긴 숨을 내쉬자 엄청난 피로가 엄습해왔다. 눈앞이 차츰 어둠속에 잠겨갔고, 결국 완전히 의식을 잃고 말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