레이저의 보고를 들은 크무트는 깊은 고민에 잠겼다. 그는 창문 바깥의 풍경을

바라보았다. 자정이었다. 모든 이들이 불을 끄고 잠에 들 시간이었다. 침입자들

의 시체는 이미 용병들에게 명령해 얼른 처리하도록 했다. 덕분에 저택의 하인들

사이에서는 작은 소동만 벌어졌을 뿐이었다. 하인들은 유언비어와 소문에 당혹

스러워 했지만 계속해서 다가올 연회를 준비했다.

“곧 적당한 훈련장소를 마련해주도록 하지. 하지만 인간들이라……그건 좀 의

외로군. 인간들과 힘을 합친 가문이 있을 줄이야.”

“표면상으론 그렇지요.”

크무트 맞은편에 앉아 있던 잉겐이 입을 열었다. 그녀에게서 무화과 향기가 났

다.

“그렇습니다. 때문에 놈들의 정확한 신분을 밝혀내긴 힘들 듯합니다.”

“레이저, 놈들에게서 무슨 정보라도 얻었나요?”

잉겐이 고개를 돌려 레이저를 바라보았다.

“아무것도 없었습니다.”

크무트는 불만스러운 듯 입을 열려고 했다. 그는 레이저를 추궁하려는 듯했지

만, 이내 말을 바꾸었다.

“음, 됐네. 그럴 줄 알았지. 하지만, 이렇게 됐으니 이번 연회는 기필코 거행되어

야 하네. 결코 연기할 수 없어.”

“가주님…….”

“레이저. 자네가 뭘 걱정하고 있는지는 알겠네. 하지만 연회 직전 누군가 우리

가문의 위세를 꺾어놓고자 했잖나. 이는 명백한 경고야. 그러니 더더욱 연회는

취소할 수 없네.”

가주는 갑자기 주제를 바꾸어 물었다.

“참, 3호는 무사한가?”

“그 아인 괜찮습니다.”

“걔가 도마뱀 일족 하날 죽였다면서요?”

잉겐은 후훗 웃었다. 어쩐지 신기한 듯한 얼굴로 자랑스러워했다.

“그렇습니다. 대역이었다는 걸 예상치 못한 탓에 방심했었지요.”

“배우는 게 정말 빠르죠?”

잉겐이 경탄했다.

레이저는 미묘한 기색을 내비치더니, 마지 못내 가주 내외들 앞에서 이를 인정

했다.

“나쁘지 않습니다.”

“자네의 엄격한 성격은 높이 살만하지. 그게 3호에게도 도움이 됐으면 좋겠군.”

크무트가 자리에서 일어섰다.

“아직까지 남아 있는 적수는 줄론 가의 앤드류, 퀴샤 가의 세실리아, 하민 가의

시드니, 우르드 가의 바제트, 지니 가의 클레이드인가……아, 클레이드는 죽었

나? 거처가 습격당했다고 들었는데.”
 

“아직 살아 있습니다. 하지만 한쪽 다리를 잃고 중병으로 쓰러졌다고 하더군요.”

“그럼 죽은 셈이나 다름없지.”

크무트는 고개를 내저었다. 그는 경의할 만한 적수가 쓰러졌음에 애석함을 표

시하듯 표정을 관리했다.

“이번 연회에 참석하기로 한 손님들 중 일부는 클레이드의 맹우들이기도 하네.

그 점을 잊어선 안 되지. 레이저. 그동안 다이애나를 호위하는데 주력하기 바라

네.”

“예.”

“ᅳ나는 ‘진짜’ 다이애나를 말하는 것일세.”

레이저는 더욱 고개를 낮추며 미소를 흘렸다.

“물론입니다.”

크무트는 다시 자리에 앉았다. 마치 재밌는 농담을 던졌다고 생각하는 듯, 입가

에 미소가 걸려 있었다. 그의 눈빛이 의미심장하게 반짝였다. 레이저는 크무트가

어디까지 알고 있는 건지 알 수 없었다. 하지만 그저 언중유골 같은 인간들의 화

법을 흉내 내고 있는 것에 지나지 않을지도 몰랐다. 레이저는 침착한 적 가장했

다.

“레이저, 부상은 괜찮나요? 오늘밤엔 가벼운 차림으로 왔군요.”

잉겐은 그런 분위기 속에서도 웃지 않았다. 오히려 조금 불편한 눈치로 레이저

의 옷차림을 바라보았다. 허술해 보이는 겉모습에 살짝 초조함을 느끼는 듯했다.

“아무 것도 아닙니다. 상처를 동여매면 오히려 빨리 낫지 않는 터라.”

“그런가요……. 잘 관리하길 바라요.”

그녀는 웃는 건지 웃지 않는 건지 모를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이며 손을 내저었

다.

레이저는 정중하게 인사를 올린 뒤 방을 나섰다. 쉬지도 않고 억지로 몸을 움직

인 탓인지, 가슴에 입은 상처가 욱신거리기 시작했다. 그는 붕대로 잘 감싼 상처

를 손으로 쓸어내렸다. 상처는 깊지 않았지만 다 나으려면 시간이 필요했다. 그

는 크무트가 은연중에 내비치던 우월감의 정체를 알고 있었다. 도마뱀 일족은 선

천적으로 단단한 비늘을 갖고 태어난다. 갑옷과 투구를 걸쳐야만 간신히 상대가

되는 인간과 달리.

하지만 그는 도마뱀 일족의 눈빛 따윈 신경 쓰지 않았다.

지난 30여 년 간의 삶을 살아오면서, 그가 깨달은 게 있다면―

살아남는 데는, 오직 한 가지 방법만이 있는 게 아니라는 사실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