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는 그럴 가치가ㅡ 젠장!”

전에 없을 정도로 버럭 화를 낸 소녀는 갑자기 팔런의 비수를 향해 자신의 목을 내던졌다.

“허?”

팔런은 소녀의 갑작스러운 행동에 깜짝 놀랐다. 그 틈을 타 소녀는 말아쥔 꼬리로 칼을 들고 있던 팔런의 팔을 내리쳤다. 소녀의 목에 선홍빛 상처가 남았지만 그의 품에서 벗어나는 데 성공했다. 소녀는 엄청난 도약력으로 두 발을 박차며 레이저를 가로막고 있던 두 남자를 향해 뛰쳐들었다. 비좁은 계단참에 서 있던 인간들은 피할 곳이 없었다.

소녀에겐 어떤 무기도 없었다. 아니, 처음부터 필요 없었다.

낙하할 때의 무게를 실은 날카로운 발톱이 가장 가까이 서 있던 인간을 향해 날아들었다. 인간을 땅바닥에 쓰러트린 소녀는 몸을 반쯤 굽힌 채, 길쭉한 꼬리를 채찍처럼 휘둘러 다시 일어나려던 인간의 얼굴을 강타했다.

얼굴을 얻어맞은 인간은 정신을 잃고 쓰러졌다. 하지만 민감한 꼬리를 무기로 쓴 탓인지 소녀에게도 엄청난 고통이 밀려왔다. 눈물이 순간 핑 돌았지만 눈을 깜빡일 시간도 없었다. 당장 자리에서 일어나 남은 인간을 향해 달려들었다. 두 사람은 육탄전을 벌이며 서로를 계단 밖으로 밀어내기 위해 몸부림쳤다.

당연하지만 팔런도 소녀를 뒤따라오기 시작했다. 고개를 돌려 확인하기도 전에 소녀의 민감한 감각이 그가 풍기는 살기를 먼저 감지했다. 소녀는 극도의 공포에 사로잡혔지만, 이내 분노로 떨리는 몸을 잠재웠다. 소녀는 자신이 대체 무엇 때문에 분노하고 있는 것인지 알 수 없었다. 레이저 때문이었을까? 왕위 쟁탈전 때문이었을까? 아니면 무력하기 짝이 없는 자신 때문이었을까?

소녀는 고아였고, 거지였으며, 살수이기도 했고, 왕족이기도 했다. 그러나 아는 것이 많아질수록 오히려 더더욱 무지하다는 사실만을 깨달았다. 대체 어떻게 해야 이 무력감의 족쇄에서 벗어날 수 있을지 몰라서, 소녀는 그저 자신을 향해 되뇔 수밖에 없었다.

“죽으면 안돼요! 레이저!”

소녀는 자신을 설득하려는 듯 소리치기 시작했다.

“살아요!”

소녀는 울부짖듯 소리치다가 기력을 다한 듯 무너져 내리기 시작했다. 소녀가 인간의 손에 붙잡히기 바로 직전, 딱딱하게 굳어 있던 레이저의 몸이 다시금 움직이기 시작했다.

금방이라도 자신의 심장을 찌를 것 같았던 그 비수가 소녀의 눈앞에서 인간의 등속으로 파고들었다. 고통에 찬 비명과 함께 인간은 쓰러졌다. 소녀도 그와 함께 무기력하게 주저앉고 말았다.

그녀가 알던 남자가 다시 모습을 드러냈다.

레이저는 걸음을 내딛기 시작했다. 주저앉은 소녀를 넘어 앞으로 걸었다. 팔런은 증오에 찬 함성을 내지르며 레이저를 향해 단검을 내뻗었다. 레이저는 온 정신을 집중해 자신을 향해 날아드는 검을 피하고 그의 팔을 붙들었다. 그리고 안으로 파고들어 팔꿈치로 팔런의 가슴께를 후려쳤다. 가슴을 얻어맞은 팔런은 비틀거렸다. 레이저는 손을 놓지 않고 계속해서 팔런의 가슴과 목젖에 주먹을 꽂았다.

팔런은 빗줄기처럼 내리치는 주먹질을 팔을 들어 막아 낸 뒤, 무릎을 레이저의 허리에 찍었다. 하지만 레이저는 고통을 느끼지도 않는 듯, 거리를 벌리지도 않은 채 더욱 매섭게 팔런의 아래턱과 콧등을 강타했다. 팔런은 움찔거리며 비틀거렸다. 눈빛은 흐려졌고 정신을 반쯤 놓은 채 흐느적거렸다.

더 이상 싸울 필요도 없었다. 팔런의 단검을 빼앗은 뒤 그를 향해 힘껏 내찔렀다. 여태까지 당했던 것을 보복하듯, 단검은 남자의 눈구멍을 파고들었다. 레이저는 단검을 뽑지 않고 내버려두었다. 땅바닥에 널브러진 시체에 눈길을 돌리지도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