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 아직도 무기를 꺼내지 않는 거지?”

레이저는 팔런을 향해 묻고 있는 듯했다.

“웃기는 소리. 내가 활이라도 들고 있었다면 네놈이 모습을 보였을 것 같나?”

팔런은 비웃듯이 말하며 아무것도 들고 있지 않은 두 손을 내보였다. 곁에 선 소녀를 돌아본 그는 가볍게 그녀의 손목을 움켜쥐었다.

“정말 다급했나보군, 레이저. 옛날 같았으면 절대 빈손으로 나타나지 않았을 텐데.”

레이저의 안색이 딱딱하게 굳어졌다.

“네놈…….”

“아가씨. 수영은 할 줄 아십니까?”

팔런은 소녀가 도망치지 못하도록 손에 더욱 힘을 주었다.

그의 얼굴을 바라보는 순간, 소녀는 등골이 오싹해졌다. 고개를 젓지 않았다. 하지만 남자는 소녀의 눈빛에서 답을 찾아낸 것 같았다. 소녀가 발버둥치며 벗어나려고 하자, 남자는 소녀를 밀어젖히며 난관 위에 콱 짓눌렀다.

세상이 순간 뒤집어졌다. 무척이나 현기증 나는 광경이었다.

겁에 질린 소녀가 새된 비명을 내질렀다.

“3호!”

레이저는 이를 악문 채 소리쳤지만, 그 목소리는 어쩐지 망설임이 섞여 있었다.

“그 아이를 놔줘!”

“당신을 3호라고 부른 겁니까?”

팔런은 흥미로운 듯한 표정으로 소녀를 훑어보았다.

“그건 번호처럼 들리는데, 설마 당신이 다이애나가 아니란 뜻입니까?”

그의 손아귀 힘이 말소리와 함께 점점 더 커져갔다. 소녀의 정체 따윈 아무래도 상관없다는 듯이.

“나는……!”

난간 너머로 몸의 절반이 넘어간 순간, 머릿속이 공포로 새하얗게 질려갔다.

‘안돼, 이대로 있다간 죽을지도 몰라.’

그런 생각과 함께 소녀는 행동에 나섰다. 꼬리를 휘둘러 남자의 종아리를 움켜쥔 뒤, 두 다리로 난간을 힘껏 찼다. 남자는 균형을 잃고 뒤로 넘어졌다. 팔런을 쓰러트리는데 성공한 소녀는 재빨리 그의 손아귀에서 벗어나 눈 깜짝할 사이에 등대의 옥상 위로 기어오르기 시작했다.

“젠장.”

팔런은 재빨리 몸을 일으켰다. 순간 믿을 수 없다는 표정을 지은 그는 곧장 소녀를 뒤따르기 시작했다.

막다른 길로 도망친 것뿐이었지만, 소녀가 벌어준 시간은 레이저가 행동을 개시하는 데 충분했다.

레이저는 더 이상 망설이지 않았다. 땅을 박찬 그는 곧장 등대 쪽을 향해 내달렸다. 그러나 등대 입구에 다가서자마자 인간 네 명이 문안에서 뛰쳐나왔다. 레이저는 망토 안에서 두 자루 단검을 꺼내들고 인간들과 근접전을 벌였다.

소문에 따르면 시어도어 왕은 전쟁 이외의 위협에도 대처하기 위해 암암리에 특수작전부대를 양성하고 있다고 했다. 머릿수는 적었지만 무척이나 수법이 교묘하고 임기응변에 강해 일반 병사보다 훨씬 대처하기 어려운 자들이었다.

‘……속전속결로 끝내야 한다. 시간을 끌수록 위험해.’

그때, 가장 덩치가 큰 남자가 날린 발차기가 레이저의 복부에 적중했다. 레이저는 고통을 삼키며 그자의 다리를 붙잡고 땅바닥에 패대기친 뒤, 단도로 순식간에 급소를 내찔렀다.

장검을 든 두 병사가 그 틈을 노리고 레이저를 향해 달려들었다. 레이저는 검은색 망토를 휘날리며 몸을 피했지만 끊임없이 날아드는 검격에 가죽갑옷 위로 수많은 검흔을 남기며 점점 궁지에 몰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