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장 이 순간만 해도, 소녀의 눈빛에선 존경의 기미는 찾아볼 수 없었다. 오히려 냉정하고 경계심 어린 눈빛으로 자신을 바라보고 있었다. 자신을 주시하는 그 날카로운 눈빛은 마치 진짜 다이애나의 눈빛과 닮아 있었다.

“정말 예상외로구나. 내가 이렇게 널 잘 가르쳤을 줄이야.”

그는 자조하듯 냉소를 지은 채로 겨우 입을 열었다.

“가거라. 돌아가서 가주께 보고하겠다. 그런 뒤에 계속 사람을 보내 감시하마.”

소녀는 조용히 고개를 끄덕이며, 뒤로 몇 걸음 물러났다.

하지만 레이저의 목소리가 계속해서 따뜻하게 들려왔다.

“하지만 꼬맹아, 후안 가를 버리고 왕위 쟁탈전에서 도망치도록 하려던 건, 네 생명을 지키기 위한 가장 좋은 방법이었기 때문이었어. 잘 생각해라. 만약 네가 계속 자신의 안전 따윈 아랑곳하지 않는다면, 그럼 나도 어쩔 수…….”

레이저의 말은 갈수록 위험해졌다. 그때 마침 불어온 바람에 그의 목소리가 흐릿하게 들려왔다.

소녀는 숨을 헐떡였다. 대답할 용기가 나지 않았다. 그저 계속해서 뒷걸음질만 쳤다. 하지만 레이저는 막아서지 않았다. 소녀는 몸을 돌려 전속력으로 내달렸다. 불길과 연기가 피어오르는 그곳을 향해 미친 듯이 뛰었다.

레이저의 얼굴을 다시 떠올리는 것만으로도 소녀는 질식할 것만 같은 기분이 들었다. 그토록 무력한 모습의 레이저는 본 적이 없었다. 그가 말하는 모든 말 한 마디가 무척이나 진지해서, 너무나 진지해서 소녀는 두려웠다.

‘대체 왜 갑자기 그런 말을 꺼낸 거지? 어째서 날 데려가려는 거야?’

그건 레이저의 진심에서 우러나온 고백일까, 아니면 사랑으로 포장된 함정에 불과한 것일까?

소녀는 마치 도망치려는 듯 화재현장 안을 내달렸다. 때마침 샤킬의 거대한 육체가 소녀를 향해 달려와 휘날리던 불똥과 연기를 막아섰다.

“어디로 가려는 거냐!”

샤킬의 팔뚝이 순식간에 소녀의 팔꿈치 사이로 파고들었다. 손쉽게 소녀를 사로잡은 그는 두 손으로 소녀의 어깨를 꽉 누르며 위협적인 목소리로 고함을 내질렀다.

“도망칠 생각하지 마라, 다이애나! 말해, 누가 불을 질렀지?”

“몰라요.”

소녀는 떨면서 고개를 내저었다.

“헛소리! 빌어먹을 전사 셋이 죽어 있었어! 그것도 아주 깔끔한 솜씨로 죽여 놨더군. 그래놓고 이 불길이 너랑 아무런 관계가 없다고 말할 생각이냐?”

그는 버럭 소리 지르며 힘껏 소녀의 가느다란 두 어깨를 마구 흔들어댔다.

“레이저냐? 후안 가가 약속을 어기고 우리를 기습한 거냐고?”

“몰라요!”

소녀는 온힘을 다해 울부짖었다.

“레이저가 아니에요……레이저일 리가 없다구요!”

“무슨 헛소리ㅡ”

“아니에요……아니라구요…….”

소녀는 발을 신경질적으로 굴렀다. 두 손바닥에 얼굴을 묻고 흐느끼며 같은 말을 몇 번이고 중얼거렸다.

샤킬의 표정이 순간 거북한 듯 일그러졌다.

“그러고도 그놈을 안 좋아한다고?”

“닥쳐요……!”

“하, 나보고 닥치라니, 아가씨 꼬라지나 한 번 돌아보고 말해.”

샤킬은 입을 다물고 소녀를 자신의 어깨에 들춰 멨다. 그리고 소녀의 울음을 무시하는 척하며 손을 들어 다른 전사들을 불렀다.

“불을 지른 놈의 행방을 알아냈나?”

남아 있던 전사들은 그의 말에 고개를 내저었다. 샤킬은 고개를 돌려 더더욱 거세지는 불길을 바라보며 혀를 찰 뿐이었다.

“다음 지점으로 계속 이동한다. 경계 태세를 늦추지 마라. 출발!”

그들은 다시 대오를 정비하고 출발했다. 소녀는 샤킬에 의해 다시 두 손을 포박 당했고, 수레 위에 앉아 끌려갔다. 불길을 머금었던 바람은 점점 차가워졌다. 뺨에 흐르는 눈물이 마치 뼛속을 파고드는 것만 같았다. 저 멀리 언덕 위엔 더 이상 사람의 흔적이 보이지 않았다. 레이저는 사라졌다. 하지만 그가 바람 속에서 말하던 그 말들은 절대 잊을 수 없었다.

그때 언덕에서 당장 레이저를 죽여야 했다. 레이저의 방법을 따라, 그리고 그가 지금까지 가르쳐주었던 방식을 따라, 그녀는 레이저가 가문에 끼칠 위협을 좌시해선 안됐다.

하지만 소녀는 그렇게 하지 못했다. 두려웠기 때문은 아니었다. 그건 자신도 아직 이해할 수 없는 어떤 이유 때문이었다.

소녀는 레이저를 향해……대체 무엇을 망설이고 있는 걸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