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참을 속으로 끙끙대던 그는 힘겹게 입을 열었다.

“네게 설명해주기 너무 어려운 얘기야. 그러니까, 넌 후안 가로 돌아가고 싶은 생각뿐이란 거냐, 맞나?”

“맞아요, 하지만……샤킬은 절 납치하고도 바로 죽이지 않았어요. 의뢰자에게 더 많은 돈을 내놓으라고 요구하면서 후안 가문에도 몸값을 요구했죠. 저는 그자가 왕위쟁탈전을 틈타 뭔가를 노리고 있는 것만 같아요. 그리고 그 배후엔 다른 자가 있고요. 그걸 확실하게 조사하고 싶어요.”

소녀는 경계심을 품은 채 조심스럽게 말했다.

그는 소녀의 추론을 부정하지 않고 잠시 생각에 잠겼다.

“대체 어떻게 조사하겠단 거지?”

“샤킬 곁으로 돌아간다면, 분명 배후에 숨겨진 진짜 목적을 찾아낼 수 있을 거예요.”

“다시 돌아가서 인질이 되겠다고?”

그는 다시 고개를 휙 돌렸다. 그리고 노여움을 숨기지 못한 채 소리쳤다.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냐! 후안 가를 위해 네가 그렇게 위험을 감수할 필요는 없어!”

“하지만, 일이 잘 풀린다면, 배후에 숨은 범인의 이름도 알아낼 수 있……”

“3호, 왕위 계승전은 어리석은 권력 놀음에 불과해! 너한테는 아무런 의미도 없어. 아직도 모르겠나? 만약 가주가 널 희생시키기로 결심한다면, 나라고 해도 네 목숨을 지켜줄 방법이 없단 말이다!”

소녀는 입술을 꽉 깨물었다. 마음속에서 무언가가 깨져버리는 소리가 똑똑히 들려왔다. 배신당했다는 고통이 가슴을 찔러왔다. 하지만 그녀는 마음을 가라앉힌 채, 솔직한 심정으로 레이저의 분노한 얼굴을 마주했다.

“난 3호가 아니에요, 난 다이애나예요.”

그녀는 자신이 겁먹었다는 사실을 들키지 않기 위해 안간힘을 쓰며, 조심스럽고 슬픈 목소리로 말했다.

“만약 선생님이 절 도와주신다면……방금 전의 위험한 발언은, 못 들은 걸로 할게요.”

“뭐가 위험한 발언이라는 거냐?”

그가 성난 표정을 지었다.

“한 번 배반한 자는, 반드시 다시 배반한다고 했어요.”

소녀는 눈을 질끈 감으며 고개를 픽 돌렸다. 그의 눈빛을 보지 않는다면, 계속해서 침착한 것처럼 행동할 수 있을 것만 같았다.

“선생님, 선생님의 말은 저보고 후안 가를 배신하라는 말이나 마찬가지에요. 그렇다면 이제 더 이상 선생님을 믿을 수 없어요. 그저……제게 가르쳐주셨던 방법대로 선생님을 대할 수밖에요.”

멈칫.

“뭐라고?”

“하나 더 있어요. 후안 가에서 다른 용병들을 데려오기 전까지, 전 선생님과 함께 떠나지 않을 거예요. 절 어디로 데려가려고 할지 모르니까요, 아니, 알고 싶지도 않아요. 만약 제가 정말로 믿어주길 바란다면, 더 많은 사람을 데려오세요.”

“젠장, 넌 대체ㅡ!”

레이저는 말문이 턱 막혔다.

‘살아남는 것’, 그런 무척이나 자연스러운 본능을, 소녀가 거절할 거라고는 전혀 생각지도 못했다.

그 순간, 레이저는 자신이 실수한 게 아닐까 하는 생각에 사로잡혔다. 초조함을 내비친 게 오히려 두 사람의 관계를 돌이킬 수 없는 상태로 만든 것 같았다.

날카로운 바람소리만이 두 사람의 귓가에 울려 퍼졌다. 그 침묵의 시간 동안, 두 사람은 서로의 눈빛을 몇 번이고 바라보았다. 레이저는 더 좋은 방법이 떠오르지 않았다. 만일 소녀를 강제로 끌고 간다면, 그녀는 레이저를 다른 왕위 후보자가 보낸 첩자로 여기고 말 것이다. 그렇게 되면 왕위 쟁탈전이 끝나기 전까지 소녀는 계속해서 레이저로부터 도망쳐서 후안 가로 돌아가려고 시도할 게 뻔했다. 그녀는 영원히 레이저를 믿지 않을 것이었다.

소녀가 그렇게 생각한다고 하더라도 그녀를 탓할 수는 없었다. 왜냐하면 그게 바로 레이저가 소녀에게 가르쳐주었던 모든 것이었기 때문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