레이저는 협박문을 읽어나갔다.

그저 평범한 종이에 적힌 간단한 글줄일 뿐이었는데도 노골적인 악의가 풍겨나왔다. 그는 가주 앞에서 몇 번이고 글을 다시 읽으며 깊은 고민에 잠긴 척했다. 하지만 실제로는 냉정을 유지하는 데도 온 정신을 쏟아 붓고 있는 중이었다.

일이 이렇게 커질 줄이야. 고작 몇 시간 소녀 곁에서 떨어져 있었을 뿐이었다. 그런데 소녀가 후안 가문 용병들의 눈앞에서 납치됐다고?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는 일이었다. 그는 다시 한 번 편지에 적힌 내용을 읽었다. 범인들은 구역질나도록 높은 몸값을 요구하고 있었다.

가주 부부는 레이저를 불러들였다. 표면상으로는 그의 직무 태만에 대해 추궁하기 위해서였다. 하지만 실제로는 달랐다. 부부는 초조하고 근심어린 얼굴로 레이저를 바라보고 있었다. 편지를 다 읽은 그가 무슨 생각을 꺼내놓을지 기다리고 있었다.

“레이저, 어떤가요?”

“놈들은 아직 자신들이 납치한 게 다이애나 아가씨가 아니란 걸 모르고 있습니다.”

레이저는 결론부터 꺼내놓기로 결정했다.

“그 점을 이용해야 합니다.”

가주 부부는 고민에 잠겼다. 하지만 그들은 막막해할 뿐이었다.

“설마 자네는, 우리가 그 아이를 구해야 한다고 말하는 것인가?”

레이저는 자기 입으로 그 질문에 대답하고 싶지 않았다.

가주 부부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는 뻔했다. 납치당한 소녀가 유괴범들에게 살해당하는 것이 가장 좋은 시나리오일 터였다. 그렇다면 다이애나는 몸을 숨긴 채 ‘부활’하기 적절한 시간을 기다릴 수 있을 테니까. 그리고 그 시기는, 다른 가문의 후보자들이 모두 동귀어진하고 난 다음일 터였다.

“구하건 구하지 않건 그것은 부차적인 문제라고 생각합니다. 전 이번 기회를 이용해 사건의 배후에 누가 있는지를 찾아낼 생각입니다만……우리가 협박문을 받고도 아무런 행동도 취하지 않는다면, 사람들은 분명히 무언가 이상하다는 걸 눈치채겠지요. 우리가 가진 손패를 벌써부터 노출시킬 필요는 없습니다.”

레이저는 부부가 받아들일 법한 설명으로 두 사람을 설득시키려고 했다.

크무트가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그 금액은……너무 과해.”

ㅡ이건 연회에서의 시험의 연장선인가? 레이저는 미간을 찌푸리며 속으로 생각했다.

“이건 속임수인 게 분명해요! 돈을 쥐어준다고 그 아이를 놔줄 것 같아요? 놈들은 우리 후안 가문을 철저히 짓밟을 생각이에요. 우리가 영원히 왕위쟁탈전에 참가하지 못하도록 만들려는 거라구요!”

잉겐이 불현듯 끼어들었다.

“가주님, 우선 무례를 용서하십시오. 만약 저들이 정말로 그렇게 하고자 했다면, 놈들은 곧바로 가주님들을 노리면 됐을 겁니다. 두 분이야말로 후안 가문의 핵심이니까요.”

크무트는 살짝 불쾌한 듯했지만, 이내 레이저의 발언에 숨겨진 진의를 눈치챘다.

“그러니까 자네는……유괴범들이 특정 왕위 후보자를 지지하고 있다는 게 아니란 뜻인가?”

“그렇습니다. 놈들은 왕위쟁탈전의 규칙을 악용해 난장판을 벌이고 있을 뿐입니다.”

“의문투성이군……하지만 그게 사실이라면 더더욱 적극적으로 대응할 필요가 없지.”

크무트는 입술을 비죽이며 꼬리를 살랑거렸다.

“이는 후보자 암살시도와는 달라. 한 번 실패하면 두 번째 시도는 무의미하지. 즉, 이번 일은 단발적이고 우발적인 상황이란 말일세.”

레이저는 주먹을 움켜쥐면서 긴장한 티를 내지 않고자 했다.

“그렇다고 확신하긴 이릅니다.”

크무트는 그 말에 동의하지 않는 듯 침묵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