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신이 든 소녀는 자신이 유년 시절의 기억 속을 헤매는 중이라고 생각했다.

그녀는 딱딱하고 뜨거운 바닥에 누워 있었다. 사방엔 빛이라곤 찾아볼 수 없었다. 철창 위에 드리운 천 때문인지 앞이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한참을 두리번거리던 소녀는 자신이 꿈을 꾸고 있는 게 아니라는 걸 깨달았다. 연회 도중에 있었던 일이 떠올랐다. 소녀는 재빨리 사지로 바닥을 짚고 허리를 웅크린 채 경계 태세를 취했다. 그리고 주변에서 들려오는 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순간 자신의 몸에서 비릿한 피 냄새가 느껴졌다. 하지만 몸에는 어떤 상처도 없었다. 그녀의 몸에 생긴 문제라고 해봤자 이제 막 잠에서 깬 탓에 피곤하다는 것뿐이었다.

“다이애나, 일어났나?”

바깥에 있는 자가 소녀가 움직인 걸 눈치 챈 듯 말을 걸어왔다. 고작 부스럭거리는 소리만 듣고도 소녀의 상태를 파악하다니, 무척이나 예민한 자였다. 소녀는 더욱 경계를 늦추지 않았다.

“당신은 누구죠?”

“아가씨를 납치한 사람이지.”

천 바깥에 선 도마뱀이 웃음을 터뜨렸다.

“나만 납치한 건가요?”

“당연하지. 아가씨는 후안 가문의 왕위계승자니까. 몸은 깼지만 머리는 아직도 꿈나라인가 보군.”

그 말은 곧 다른 사람들은 죽이지 않았다는 뜻이었다. 그것보다 더 중요한 건, 자신의 신분을 아직 들키지 않았다는 것이었다.

소녀는 살짝 한숨을 내쉬었다. 하지만 아직 긴장을 풀어선 안됐다. 그녀는 계속해서 다이애나를 연기하기로 결정했다.

“어떻게 우리 저택의 삼엄한 경비를 뚫고나온 거죠? 설마, 우리 부모님들까지 해코지한건 아니겠죠!”

“정말 아가씨 하나뿐이라니깐. 좋아, 어떻게 했는지 말해주도록 하지……. 할리파의 가주가 숨을 거뒀네. 후안 가문에 폐를 끼치지 않기 위해 그 자의 시체는 부상을 입은 가신들이 다급하게 운구해갔지. 그때를 틈타 아가씨도 마차에 옮겨 실었고. 피로 얼룩진 포단으로 아가씨를 동여매놨더니 아가씨네 용병들은 얼굴을 확인하려고 들지도 않더군.”

소녀는 숨을 들이켰다. 자신의 몸에서 나는 피냄새가 어디에서 온 것인지 깨달았다.

그와 함께 소녀는 자기가 누구와 말하고 있는 것인지도 눈치 챘다. 소녀는 떨리는 목소리로 물었다.

“당신, 오찬 때 일부러 할리파 가의 가주를 공격했군요.”

철창을 가리던 천이 갑자기 벌컥 잡아당겨졌다. 하지만 눈부신 햇살이 곧장 새어 들어오진 않았다. 그녀가 있는 곳은 낯선 방 한가운데였다. 정확히 말하자면 언제든 이동할 수 있는 천막 안이었다. 둥그런 천막엔 초라한 가구들과 기름등밖에 보이지 않았다. 높이도 도마뱀 일족보다 머리 하나 정도 더 큰 수준이었다. 소녀 앞에 쪼그려 앉은 도마뱀 일족은 아주 느긋한 태도로 미소를 지었다.

“아니, 그땐 단지 별 생각 없이 주먹을 들었을 뿐이지. 그런데 아가씨가 갑자기 병문안을 올 줄 누가 알았겠나! 이게 다 아가씨의 돌발행동과 내 수하들의 임기응변 덕분이지. 그게 아니었으면 손 쓸 기회를 찾느라 얼마나 애를 먹었을지 몰라!”

수흐 가의 가주가 쪼그려 앉은 채로 철창을 가볍게 몇 번 내려쳤다.

“그나저나 이렇게 구역질나는 이야기를 계속해야 하나? 벌써 아침이야, 다이애나. 아침식사론 뭘 먹고 싶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