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 혹시 제가 아가씨의 이야기를 잘못 이해했던 것인지요?”

“아뇨, 그건 아니에요. 하지만 이상적인 세계란 애초에 존재할 수 없는, 신기루

와 같은 것이에요. 희생 없는 결정 따윈 있을 수 없어요. 영원히 지속될 해법 같은

것도 있을 순 없지요.”

그녀는 더욱 복잡한 미소를 지었다.

“지금껏 읽었던 저 책들은 수많은 이론들을 가르쳐주었지요. 하지만 사막왕국

의 문제를 완벽하게 해결해줄 방법 같은 건 어디에도 없었어요. 기껏해야 그저

문제를 잠시 봉합할 시간을 벌 수 있는 방법 뿐. 하지만 해결을 뒤로 무를수록, 문
 

제는 더욱 복잡해질 뿐이에요. 정치란 역사의 중첩 아래 점점 더 난해해질 뿐, 결

코 쉬워질 수 없으니까요.”

“그건…….”

“하사드, 당신도 학자잖아요. 저 이상적인 이론들을 읽어왔으면서도 그 사실을

알아차린 적이 없다고 말할 생각은 아니겠죠.”

“맞습니다. 그러나……그렇게 된다면, 왕된 자의 죄업이란 영원히 속죄할 수 없

다는 뜻이지 않습니까?”

그 순간 그녀는, 다이애나의 방에서 보았던 그 표정과 똑같은 얼굴을 하고 있었

다.

“맞아요. 왕이란 그런 존재니까요. 일말의 자유조차 허락되지 않은 존재 말이에

요.”

“아가씨께서는 왕위를 그렇게 바라보고 계셨군요…….”

하사드는 가볍게 숨을 골랐다. 전율에 휩싸였던 마음을 진정시키려는 것처럼.

“하지만 저는, 이 점을 분명히 인식하고 계신 아가씨라면, 누구보다도 더 멀리

나아갈 수 있으리라고 확신합니다. 왕이 어떤 존재인지 알면서도 그 책무를 이행

하길 바라는 것은, 쉽지 않은 각오이지요.”

‘아니야, 난 그저 꼭두각시일 뿐.’

머릿속에서 그녀의 목소리가 마치 구원을 바라듯 고함을 쳤다. 이게 그녀 자신

의 생각일까? 아니면 다이애나로부터 온 생각일까?

3호는 눈빛을 흐리며, 재빨리 그 목소리를 억눌렀다. 그리고 그런 생각 따윈 존

재한 적이 없다는 듯 가장했다.

“그걸 말이라고 하나요? 그 정도 각오도 없으면 어떻게 이 길을 걸어갈 수 있겠

어요?”

그녀는 시선을 돌려 들고 있던 책을 넘겨보았다.

“왕이 된 뒤의 일을 생각하는 것은, 쟁탈전에서 승기를 잡은 뒤에 다시 얘기하지

요. 명군이라고 오랜 치세를 누릴 수 없는 것처럼, 언제 어디서 무슨 일이 생길지

모르는 법이니까요. 이것도 역사가 가르쳐준 사실이죠.”

“아가씨 말씀대로입니다.”

하사드는 또 다시 이마를 닦아냈다.

“죄송합니다. 제가 질문이 너무 많았군요. 아가씨께선 진작에 준비를 마치셨는

데 말입니다.”

그들은 다시 수업을 진행했다. 왕위와 관련된 이야기는 더 이상 언급하지 않았

다.

수업이 끝난 뒤, 하사드는 아가씨와 호위를 배웅했다. 탁자 위에 남겨진 교과서

를 정리하면서, 동시에 아가씨가 적어둔 필기와 문장들을 정리했다. 문장의 내용

들을 자세히 읽어나가던 그는, 자신도 모르게 눈살을 찌푸리고 말았다.

다이애나는 애독가로 유명했다. 문학과 창작 모두 관심이 깊다고 들었다. 그런

데 수업 중 그는 단 한 번도 아가씨가 친필로 글을 쓴 적이 없다는 걸 깨달았다.

심지어 아가씨께 즉흥적으로 창작을 권했을 때 완곡하게 거절당한 것도 여러 번

이었다. 즉, 그들의 수업은 늘 단순한 강독과 강의로 진행되었을 뿐이었다.

하지만 그 순간, 그는 무언가를 깨달았ᅳ

“하사드 선생?”

갑자기 문이 벌컥 열렸다. 문밖에서 일렁이는 등불을 등지고 레이저가 서 있었

다. 그림자에 가려진 그 웃음은 어딘가 불길해보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