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

그녀는 순간 살짝 현기증이 났다.

이게 무슨 뜻이지? 3호는 없고, 오직 다이애나뿐이라고? 이미 진작 그렇게 해왔

다고 생각했는데, 아직도 부족하단 말이야? ……아니, 얼마나 노력했든 하사드

가 눈치를 채고 말았잖아. 다이애나 아가씨의 부상은 곧 자신의 역할을 충분히

이행하지 못했다는 증거였다. 자신이 제대로 일을 처리했다면, 다이애나 아가씨

가 다치는 일은 없었을 테니까…….

“얼른 대답해라.”

레이저는 팔꿈치로 소녀를 쿡 찌르며, 그녀의 귓가에 나직이 경고했다.

“ᅳ3호는 없어요. 이해했습니다.”

그녀는 공허한 목소리로 반복했다. 속으론 여전히 당황스러웠지만, 몸은 좌중

앞에서 다이애나다운 모습을 본능적으로 따라했다. 망설여선 안됐다. 그녀는 계

속해서 나아가야 했다. 그게 바로 그녀가 해내야 할 일이었으니까.

“연회에서의 일은 맡겨주세요. 만약 손님 가운데 감히 의심을 품는 자가 있거든,

찍 소리도 못하게 만들겠어요.”

후안 부부는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자리에서 일어나 방을 떠날 준비

를 했다.

레이저와 소녀는 다이애나의 침대 곁에서 한참을 서 있었다. 가주 내외가 방을

떠난 뒤, 레이저는 고개를 들었다. 그는 어쩔 줄 모르는 태도로 머뭇거리며 말했

다.

“울지 마라. 조금 당황스러운 요구긴 하지만, 이걸로 네 처지는 더 나아질 거다.”

그는 낮게 읊조렸다.

“운 적 없어요.”

레이저의 말을 들은 그녀는 살짝 몸을 떨기 시작했다.

“그럼 네 얼굴에 흐르는 건 뭐냐?”

“말했죠, 운 적 없다구요.”

그녀는 차갑고 딱딱한 목소리로 말했다. 레이저는 고개를 숙였다. 소녀의 눈가

에 남은 눈물 자국과 원망 어린 얼굴. 끓어오르는 분노는 새어나갈 곳이 없었기

때문에 그를 향해 쏟아져 나올 수밖에 없었다.

“3호, 너…….”

“다이애나라고 했죠.”

그녀는 레이저의 호칭을 정정했다. 눈가에서 이글거리는 불길은, 어쩌면 그저

분노 때문에 생겨난 감정일지도 몰랐다. 하지만 그는 소녀가 내뿜는 기세에 눈을

떼지 못했다. 지금 그의 앞에 선 소녀는 진짜 다이애나와 구분할 수 없었기 때문

이었다.

“이제야 상품 번호를 버린 거예요. 그렇겠죠?”

그는 소녀를 쳐다보면서, 자신의 말이 불쾌하게 들리지 않도록 조심스럽게 말

했다.

“예전에 말했던 것처럼, 넌 그자들에게 있어서 장기말에 불과해. 호칭을 바꾼다

고 해도 달라질 건 없어.”

“맞아요. 그럴지도 몰라요. 당신도 장기말이고, 저도 마찬가지죠.”

그녀는 고개를 내저었다. 그리고 고통스러운 표정으로 침대에 누워 있는 아가

씨를 쳐다보았다.

“ᅳ우리 모두가 장기말이죠. 아가씨가 목숨을 잃을 뻔했는데도, 그분들은 연회
 

만 걱정하고 있다니.”

레이저의 표정엔 아무런 변화도 없었다. 진작부터 알고 있던 사실일 뿐이었다.

그런 레이저 때문에 소녀는 더욱 견딜 수 없었다. 더 일찍 깨달았어야 했다. 그녀

는 지금이 되어서야, 자신과 다이애나가 가진 진정한 가치를 직시할 수 있었다.

후안 가의 부부는 자식을 왕위쟁탈전에 내세울 방패로 여기고 있을 뿐이었다. 설

령 다이애나가 왕위에 오른다고 할지라도, 가주 내외는 배후에서 실질적인 왕으

로 군림하며 국정을 좌지우지할 것이었다.

자신도, 다이애나도 그들이 왕위에 다가가기 위한 초석에 불과했다.

“이제 어떻게 해야 하죠?”

그녀는 망연자실한 듯 얼굴을 가렸다. 눈물이 그녀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흘러

내렸다.

“간단해. 대역이 되고 싶지 않다면, 떠나라.”

“그러면 아가씨는요? 아가씨는 어쩌고요?”

“알 게 뭐야. 그 뒤엔 자신이 알아서 해결할 일이지.”

고개를 떨군 소녀는 크게 흐느끼기 시작했다.

“선생님 당신은……어떻게 그토록 냉정할 수 있죠……!”

“도마뱀 일족에게 그런 말을 듣고 싶진 않군.”

한 마디 쏘아붙인 레이저는 헛기침을 하더니, 문을 돌아보았다.

“이제 그만 일어나라. 시녀가 곧 찾아올 테니. 네 방에 돌아가서 천천히 고민해.

다이애나 아가씨는 신경쓰지 마라. 네가 뭘 해야 할지 고민하는 걸로 충분해.”

“고민한 다음엔요?”

레이저는 잠시 생각했다.

“왕위 쟁탈전에서 도망치고 싶다면, 내가 널 도와주마.”

그리고 그는 조용히 말을 덧붙였다.

“……어차피, 더 이상 3호로 불리지 않는다고 해도, 진짜 다이애나가 될 수는 없

으니.”

ᅳ그 말은 곧, 지금도 레이저는 여전히 자신을 인정하지 않았다는 뜻이 아닌가.

절망적인 결론을 내린 그녀는 눈물을 흘리며 자신의 방으로 돌아갔다.

가주 내외의 명령과 레이저의 평가가 마음속에서 계속 충돌을 일으켰다. 바닥

에 주저앉은 그녀는 머리를 부여잡았다. 지금껏 느껴보지 못했던 엄청난 절망감

이 그녀를 엄습했다. 후안가문은 그녀에게 모든 것을 주었지만, 동시에 그녀의

모든 것을 빼앗아갔다.

……내 전부를 아무런 조건 없이 바칠 수 있다고 생각했는데, 대체 어째서……

“모르겠어……난……대체 어떻게 해야…….”

그녀는 중얼거리면서 온몸을 둥글게 움츠렸다.

하늘의 어둠이 걷혀 다시 밝아올 때까지도, 그녀는 여전히 잠에 들지 못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