잠시 후 부부는 식당을 떠났다. 남은 음식은 소녀와 레이저에게 마음껏 먹도록 했다. 소녀가 음식에 손을 거의 대지 않은 게 마음에 걸린 모양이었다. 소녀는 두 손을 가슴께에 모아쥐었다. 아직도 마음이 진정되지 않았는지 새끼손가락이 파르르 떨렸다.

“……두렵나?”

“아니요, 그냥, 가주님과 이렇게 얘기를 나눈 게 오랜만이라…. 긴장했을 뿐이에요.”

소녀는 가쁜 숨을 내쉬면서 허둥지둥 말을 내뱉었다.

“저 같은 사람에게 이토록……다정하게 대해주실 줄 몰랐거든요.”

“겉치레로 하는 말에 불과해.”

그녀는 잠시 머뭇거렸다.

“그래도, 기쁜 걸요.”

레이저는 눈을 찌푸렸다. 소녀의 반응을 이해하기 힘든 눈치였다. 그가 보기엔 가주 내외는 세상물정 모르는 아이를 말로 꼬드겨내 사지로 내모는 일을 맡긴 것뿐이었다. 설령 다이애나가 왕위에 오른다 할지라도 소녀는 대역이라는 운명에서 벗어날 수 없었다. 그 운명에서 벗어나는 방법은 오직 죽음뿐이었다.

그들은 충성을 들먹였지만, 레이저는 소녀가 ‘후안 가에 대한 충성’이 가진 의미를 정확히 이해하고 있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자신이 죽을 수도 있다는 생각 따윈 아예 해보지도 않았을 것이다.

“선생님, 저도 이만 일어나볼게요.”

레이저는 그녀 앞의 빈 접시를 바라보았다.

“아직 아무 것도 안 먹었잖아.”

“그게, 좀 더 훈련을 하고 싶어요. 아가씨를 따라하는 건……아직도 어렵거든요.”

“그것도 좋겠군.”

레이저는 고개를 끄덕였다.

“가주님께서 진도에 대해 걱정하고 있으니, 앞으론 쉴 시간도 별로 없을 것이다.”

그녀는 기형적인 손을 조심스럽게 움켜쥐었다. 레이저의 말에 살짝 긴장한 것 같았다.

“전……”

“너도 알고 있겠지? 아직도 대여섯 개 가문이 왕위를 두고 다투고 있다. 대부분의 가문들은 그 힘이 막강하고, 아직까지 힘을 쓰지 않았던 가문들도 슬슬 행동에 나서기 시작할 거다. 날이 갈수록 널 노리는 습격은 더욱 빈번해질 거고.”

그는 잠시 말을 멈추고 소녀의 얼굴에서 차츰 핏기가 가시는 걸 지켜보다 말을 이어갔다.

“무슨 일이 일어나도 이상할 게 없다는 뜻이지.”

“……그건 제 임무에요. 감당할 수 있어요.”

그녀는 고개를 내저으며 정신을 다잡았다.

“내가 걱정을 해줘도 놀라지 않는단 말이지.”

그는 거의 콧소리에 가까운 목소리로 모호하게 중얼거렸다.

“네?”

“아무것도 아니다. 가자.”

두 사람은 식당을 나왔다. 레이저는 짐짓 냉혹한 표정을 짓고 있었으나 속으론 초조함을 감출 수가 없었다.

그는 아직도 후안 가에서 소녀를 처음 만났을 때를 기억했다. 가슴이 뛰었다. 자신을 살아있게 하는 그 목소리가 분명히 들려왔다, 정원에 불던 바람도, 두 사람에게 내리쬐던 햇살의 따뜻함도, 그리고 소녀의 손을 잡았을 때 느껴지던 뭉개진 손가락의 투박한 감촉도. 소녀는 레이저를 알아보지 못했다. 그가 어째서, 더 이상 아프지도 않은 자신의 손가락에 가슴 아파하는지. 소녀는 알지 못했다. 그것은 레이저가 살아 있음을 증명하는 증거였고, 소녀가 살아남았음을 증명하는 증거이기도 했다.

하지만 그 빛은 곧 사그라져버렸고 남은 날들은 오직 당혹스러움의 연속이었다.

소녀는 자신에게 닥쳐올 위기를 의식하지도 못하고 있었고, 장족의 발전을 보여주지도 못했다. 그저 멍한 눈빛만으로 자신을 바라보고만 있을 뿐이었다. 어쩔 땐 넋이 나간 것처럼 아무런 생기도 느껴지지 않을 때도 있었다. 그게 바로 레이저를 조급하게 만드는 주된 원인이었다.

소녀가 어떤 인생을 살아왔는지 알 수는 없지만, 그것이 대역 훈련에 있어 가장 큰 걸림돌이 되고 있는 게 틀림없었다. 그녀는 다이애나를 모방하는데 있어 마음속 가장 중요한 무언가가 부족했다. 그녀의 노력이 부족한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노력한 시간이 길어질수록 그녀의 무력함 역시 길어져만 갔다.

레이저는 소녀의 마음속에 숨겨진 어둠을 이해하지 못했다. 하지만 이대로는 안 된다는 것만은 확실했다.

그는 이렇게 변해버린 소녀를 보기 위해서, 후안 가와 손을 잡은 게 아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