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업이 끝났다. 선생님은 두 사람은 인사를 나눈 뒤 교실을 떠났다. 다이애나는 장갑을 꼭 쥔 채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그리고 레이저를 휙 돌아보았다. 그녀는 목소리를 죽인 채 속삭이듯 물었다.

“선생님을 죽이진 않을 거죠?”

“겨우 그 정도뿐인데, 그럴 리가요.”

레이저가 한 마디 더 덧붙였다.

“아주 좋은 대처였습니다.”

“그럼 됐어요.”

다이애나는 다시 장갑으로 시선을 돌리더니, 원망 어린 목소리로 대꾸했다.

“정말이지, ‘걔’만 아니었다면, 장갑을 이렇게 많이 만들 필요도 없었을 거라구요.”

“제 눈에도 아가씨께 정말 잘 어울리십니다.”

”당신 칭찬 따윈 필요 없어요.“

그녀는 안절부절 못한 표정을 짓더니, 두 손을 꼭 움켜쥘 뿐이었다.

“으, 피곤해요. 일단 방으로 돌아가죠.”

“하지만 가주님께서 아가씨와 함께 만찬을 드시고 싶다고 하셨습니다만.”

“피곤해요.”

“그렇군요.”

다이애나는 눈을 가늘게 떴다. 레이저가 뒤따라오든 말든 문을 열었다.

“다음부턴 제가 두 번 명령하지 않게 하세요.”

그녀는 긴 꼬리를 흔들면서 성큼성큼 복도를 걸어갔다. 레이저는 머리를 헝클어뜨리면서 서둘러 그녀 뒤를 쫓았다.

그들은 길게 뻗은 홀과 복도를 지나쳐 저택 깊숙한 곳으로 향했다. 침실로 향할수록 복잡한 계단과 좁은 복도가 점점 많아졌다. 그 길 사이에 비밀문이나 밀실들이 숨겨져 있을지도 몰랐다. 레이저는 그중 하나의 길만을 알고 있었다. 하지만 저택의 오랜 역사에 비춰볼 때, 후안 가의 가주조차 저택에 숨겨진 모든 비밀문의 개수는 알지 못할 것이다.

두 사람은 한참을 걸어 복도 끝에 도착했다. 다이애나는 자기 방 앞에 멈춰 섰다. 그리고 레이저를 향해 손짓한 뒤 방으로 들어갔다.

그 손짓의 의미를 알고 있는 레이저는 얌전히 문 밖에서 기다릴 수밖에 없었다.

그는 벽에 기댄 채 조용히 기다렸다. 몇 십분 뒤, 드디어 문이 열렸다. ‘다이애나’가 쭈뼛거리면서 바깥으로 걸어 나왔다. 분명히 방금 전과 똑같은 옷을 입고 있었는데 이전처럼 당당한 태도는 온데간데없었다. 그녀는 어딘가 곤란한 일을 당한 것처럼 곤혹스런 표정으로 두 손을 꼼지락거렸다.

“아가씨가……저 보고 부모님과의 저녁식사에 가라고…….”

“이봐.”

레이저는 짜증스럽게 눈을 감았다.

“가슴 펴라. 너는 지금 다이애나 아가씨니까.”

그녀는 그제야 정신을 차린 듯 서둘러 자세를 바로잡았다.

“네, 선생님.”

“말투도 바꿔.”

“그래요, 레이저.”

“그럼 이제 뭘 해야 하지?”

“그게…… 식당으로 가야겠죠….?”

“알고 있으면서 뭘 망설이나? 내가 앞장서서 갈 순 없잖아.”

“아, 네.”

……아직도 태도를 바꾸는 게 미숙한 것인가.

레이저는 불만스러운 얼굴로 앞장서서 걸어가는 소녀를 쳐다보았다. 만약 이게 가주가 언급했던 ‘새로운 계책’이라면, 후안 가는 왕위쟁탈전에서 고전할 것이 불 보듯 뻔했다. 후안 가는 왕위계승권을 두고 다투는 수많은 가문들 사이에서 두각을 드러내지 못했다. 부나 영토, 휘하에 둔 병력 모두 여타 가문보다 명백히 열세였다. 때문에 후안 가는 정상적인 방법으로는 다른 후보자들과 대결하기는 무리였다. 그 점만큼은 레이저도 동의했다.

가주 내외는 자신들의 딸 다이애나를 후보자로 올렸다. 그리고 아주 운 좋게도 비슷한 또래에 외모도 얼추 닮은 소녀를 찾아냈다. 레이저를 초청한 이유도 표면상으로는 다이애나의 경호원을 맡기기 위함이었지만, 실제로는 소녀의 무술 선생 역할을 했다. 소녀를 딸의 그림자 호위병으로 훈련시키기 위해서였다.

레이저는 힘으로 승리를 쟁취하는 스타일이 아니었다. 그는 인간의 사고방식을 토대로 상대방의 심리를 꿰뚫고 흉계를 꾸미는데 능했고, 때론 위장하여 적진에 잠입하는 역할도 맡았다. 간부직에 올랐지만 여전히 암살자와 비슷한 전투 스타일 때문에 실전 전투에서는 전력을 발휘하기 힘들었다. 하지만 그렇기에 후안 가의 가주가 세운 계획에 그보다 잘 어울리는 사람은 없었다.

그러나, 소녀는 “쓸만한 장기말”로는 불합격이었다.

레이저는 소녀의 뒷모습을 살폈다. 은색 단발머리에 비늘이 별로 없는 자줏빛 피부를 갖고 있었고, 외모는 인간과 비슷해 보이기까지 했다. 꼬리는 다이애나보다 조금 더 굵고 컸다. 체격은 조금 작고 말랐지만, 그쯤이야 의복을 몇 겹 겹쳐 입으면 아무런 문제도 없었다.

가장 큰 문제는 손이었다.

소녀는 태어날 때부터 손에 장애를 갖고 있었다. 왼손의 약지와 소지가 심각하게 뒤틀려 있었다. 그 탓에 소녀도 다이애나도 늘 장갑이나 골무를 써서 이를 가려야만 했다.

또 다른 문제는, 레이저 역시 계획에서 가장 골치 아픈 부분이라 생각했다. 가주도 이미 알고 있을 테지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