후안 부부와의 면담을 끝낸 뒤, 레이저가 방에서 걸어 나왔다. 문 앞을 지키고 있던 경비병들은 레이저를 쳐다보지 않으려고 애썼다. 하지만 그의 시선에 담긴 복잡한 의미를 캐내려는 듯, 몰래 눈을 흘겼다. 그들도 가문에 고용된 호위병이었지만, 레이저처럼 저택 안을 마음껏 드나들 수 있는 자는 아무도 없었다.

도마뱀 일족의 세력권에서 살아가는 인간들은 매우 적었다. 변변찮은 직책이라도 갖고 있는 자는 아예 손에 꼽을 수 있을 정도였다. 그런데 레이저 버나드는 최근에 중급군관 자리에 오른 유일한 인간이었다. 뿐만 아니라 이젠 왕위계승권이 있는 귀족 가문의 호위로까지 초빙되었으니, 당연히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릴 수밖에 없었다.

아무리 도마뱀 일족이 힘을 숭상하며, ‘승자가 곧 왕’이라는 구호를 늘 입에 올리는 자들이라곤 하지만, 그들에게 있어서 레이저는 그저 운이 좋은 놈일 뿐이었다. 그가 아무리 온갖 기회와 연줄을 동원해 출세를 거듭한 끝에 노예 계급에서 벗어났다고 해도, 여전히 차별적인 시선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레이저는 용병들이나 시종들 따위와 좋은 관계를 유지할 생각 따윈 없었다. 그의 목표는 오직 후안 가의 가주의 신뢰를 얻는 것뿐이었다.

그렇기에 그는 늘 도마뱀을 닮은 마스크를 쓰고, 비늘달린 갑옷을 입었다. 그러나 그것은 도마뱀 일족이 다스리는 나라에 충성을 표시하기 위함이 아니었다. 그저 귀찮은 문답을 피하기 위한 수단일 뿐이었다.

“그럼 이제….”

회랑을 지나쳐 지붕 없는 화원에 들어서자 바깥 하늘이 보였다. 레이저는 가주와의 면담에 적잖은 시간을 보냈다는 걸 깨달았다. 그는 발걸음을 재촉해 어느 방으로 향했다.

이곳은 후안 가주의 딸, 다이애나 후안 고메즈가 평소 수업을 듣기 위해 마련된 장소였다. 원예나 자수 같은 수업은 정원에서 이뤄졌지만, 다른 수업들은 대부분 이곳에서 들었다. 방안의 장식품들은 무척이나 소박했다. 다른 방들처럼 벽에 새겨진 화려한 조각들을 제외하면 방을 채우고 있는 건 대부분 물레나 시집 같은 교재들뿐이었다.

다이애나는 교실 가운데에 양반다리를 하고 앉아 있었다. 인간들과 달리 도마뱀 일족은 의자를 쓰지 않았다. 그냥 바닥에 털썩 앉거나, 꼬리를 푹신한 소파 삼아 기대곤 했다.

그녀는 선생님과 함께 장갑을 뜨개질하고 있었다. 웃고 떠들던 목소리는 갑자기 문을 벌컥 열고 들어온 레이저 때문에 뚝 멈췄다. 다이애나는 깜짝 놀라 펄쩍 뛰더니 어깨를 잔뜩 웅크렸다. 하지만 이내 냉정을 되찾고는 무례를 범한 레이저를 향해 눈살을 찌푸렸다.

“죄송합니다. 늦었군요.”

레이저는 어깨를 으쓱인 뒤, 방 한구석에 기댄 채 기다렸다.

“앉으세요. 아가씨도 금방 끝내실 거예요.”

도마뱀 여자가 눈웃음을 짓자 눈꼬리 근처에 주름이 자글자글 생겨났다. 소박한 롱스커트 아래의 꼬리가 땅바닥에서 가볍게 살랑였다.

“느긋하게 할 생각이거든요.”

다이애나가 작은 목소리로 반박했다. 그리곤 고개를 숙인 채로 장갑에 마지막 보석을 장식하기 시작했다. 그녀는 녹색 눈동자가 가려질 정도로 눈을 가늘게 뜬 채 집중했다. 이따금 선생님과 다이애나가 주고받는 목소리를 빼면 방안은 무척이나 고요했다. 30분쯤 지났을까, 새 장갑이 드디어 완성됐다.

짙은 색감을 가진 벨벳 장갑이었다. 팔뚝을 전부 가릴 수 있을 만큼 길었다. 끝부분엔 황금 체인과 보석가루들로 장식되어 있어서 마치 아름다운 별하늘을 연상시켰다. 선생님은 온유한 목소리로 칭찬했다. 다이애나도 몇 번이고 장갑을 이리저리 검사하더니, 아주 만족했는지 만면에 웃음을 지었다.

“아가씨, 갑자기 장갑을 만드시는 취미가 생기셨네요.”

기뻐하던 다이애나는 갑자기 찬물을 얻어맞은 듯 얼굴이 살짝 굳었지만 얼른 대꾸했다.

“얼마 전에 하늘색 드레스를 주문했거든요. 핑크색도 있고, 또 검은 색……초승달이 뜬 밤하늘 같은 드레스도 있어요. 옷자락이 별하늘처럼 반짝이는 옷이랍니다. 그래서 앞으로도 드레스에 맞는 장갑을 몇 벌 더 만드려구요. 장갑이 저한테 잘 어울리는 것 같거든요.”

선생님이 고개를 끄덕였다.

“아, 그렇지요. 취향은 언제든 바뀌기 마련이에요. 저도 스무 살쯤엔 레이스를 만드는데 빠졌던 기억이 나네요. 그런데 서른 살이 되고선 갑자기 온갖 색으로 디자인한 이국풍의 양탄자를 만드는 데 몰두했지요.”

“물론 그렇겠죠.”

다이애나가 한숨을 내쉬었다.

레이저는 팔짱을 낀 채 조용히 두 사람의 말을 듣고만 있었다. 무료한 나머지 대놓고 꾸벅꾸벅 조는 것처럼 보이기도 했다. 그러나 그 손은 단 한 번도 무기를 놓은 적이 없었다.